그는 나약하지 않았다… 영화적 미장센으로 부활한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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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베르테르 역 테너 이범주(A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베르테르 역 테너 이범주(A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젊은 베르테르는 샤를로트의 품에서 환희에 찬 채 죽음을 맞는다. 자신을 파멸로 이끈 사랑 앞에서도 끝내 비굴해지지 않았다. 마치 1992년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가 새로운 질서에 굴복하기보다 교실에 불을 지르고 사라졌던 강렬한 뒷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지난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국립오페라단(단장 박혜진)의 올해 첫 정기 오페라 <베르테르>의 막이 올랐다. 이번 작품은 <구로 아리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연출한 영화 감독 박종원의 오페라 연출 데뷔작이다. 그가 무대 위에 빚어낸 베르테르는 나약한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의 순간마저 자신의 신념으로 선택하는 당당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현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여주인공 샤를로트의 태도다. 프랑스 오페라의 또 다른 여성 아이콘 <카르멘>이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자유의 화신’이라면, 샤를로트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비극의 씨앗을 뿌린다.

그는 베르테르에게 명확한 거절도, 온전한 수용도 하지 않는 ‘애매한 여지’를 남김으로써 그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카르멘이 자유를 갈망하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샤를로트는 사회적 책임과 도덕을 선택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1842~1912)가 쓴 오페라 <베르테르>는 괴테의 고전을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마스네는 독일적 낭만주의 위에 유도동기를 활용해 치밀한 음악 구조를 덧입혔다.

박종원 연출은 오페라 무대에 자신만의 영화적 시야를 선명하게 투영했다. 그는 신파적 과장을 덜어내는 대신, 인물의 미세한 심리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주인공들의 곁을 그림자처럼 맴도는 두 명의 무용수는 베르테르와 샤를로트의 분열된 자아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장면마다 교차하는 영상미는 인물들의 억눌린 동경을 은유하는 세련된 미장센으로 기능했다.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무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무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무대는 흡사 영화 세트장을 옮겨놓은 듯한 세련된 색감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채워졌다. 이는 기존 오페라의 관습적인 무대 문법을 탈피하여 시각적 몰입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조명 활용법이다.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도 가수 한 명에게 조명을 집중시켜 관객의 시선을 고립시키기보다 무대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 관객이 무대 위 모든 오브제와 공간 전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조망하게 함으로써,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무용수 아바타와 베르테르 역 테너 이범주  / 국립오페라단 제공.

무용수 아바타와 베르테르 역 테너 이범주 /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 광활한 공간 속에서 베르테르의 억압된 욕망과 분열된 자아는 두 명의 무용수(아바타)를 통해 육체화된다. 성악가와 무용수가 한 공간에 동시에 머물며 보여주는 이른바 '자아의 그림자' 효과는,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의 내밀한 고통을 무언의 동작으로 객석에 선명하게 전달했다.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 4막 중 베르테르의 서재에서 권총을 찾는 베르테르.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 4막 중 베르테르의 서재에서 권총을 찾는 베르테르. / 국립오페라단 제공.

무대 디자인을 맡은 볼프강 폰 주벡은 고전적인 앤티크(Antique)함과 현대적인 공간 효율성을 결합해 감각적인 미장센을 완성했다. 1막 샤를로트의 집부터 2막의 광장과 교회, 3막의 거실, 그리고 비극의 정점인 4막 베르테르의 서재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무대는 단순한 배경의 전환을 넘어 인물 간의 심리적 거리와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정밀하게 투사했다. 고전극 특유의 우아한 미적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 장면에 배치된 여백과 오브제들은 인물들의 고립과 열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이번 프로덕션은 최상호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이 재임 시절 기획 단계부터 공을 들인 작품이다. 자칫 정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전의 리스크를 떠안고서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남다른 배경이 있었다.

이번 공연은 박종원 연출가(한예종 명예교수)와 조주현 안무가(한예종 교수)를 필두로, 출연진 상당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실력파들로 꾸려졌다. 특히 A팀 샤를로트 역의 메조소프라노 정주연과 B팀 베르테르 역의 테너 김요한은 최상호 전 단장을 사사한 성악가들이다.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베르테르 역 테너 김요한(B팀)과 샤를로트 역 소프라노 카리스 터커(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베르테르 역 테너 김요한(B팀)과 샤를로트 역 소프라노 카리스 터커(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주역들의 가창은 작품의 드라마틱한 에너지를 완성하는 핵심이었다. A팀의 베르테르 역을 맡은 테너 이범주는 로맨틱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음색으로 시작해, 극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을 폭발적으로 밀어붙이는 흡입력 있는 가창을 선보였다.

반면 B팀의 테너 김요한은 마치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에 등장하는 라다메스 장군을 연상시킬 만큼 압도적인 성량과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하며 또 다른 매력을 뽐냈다. 여주인공들의 기량 비교도 흥미로웠다. B팀의 메조소프라노 카리스 터커가 세련된 음색과 우아한 자태로 귀족적 품격이 느껴지는 샤를로트를 그려냈고, A팀의 메조소프라노 정주연은 절제미 넘치는 표현과 정확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전막에 걸쳐 단단하고 안정적인 기량을 증명했다.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에서 대법관 역으로 출연한 베이스 최공석 (A,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에서 대법관 역으로 출연한 베이스 최공석 (A,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샤를로트의 남편 알베르 역 바리톤 노동용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극의 무게중심을 잡았으며, 대법관 역의 베이스 최공석은 준수한 가창력에 유쾌한 에너지를 더해 극 전반의 흐름을 능숙하게 이끌며 작품의 완성도를 뒷받침했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견은 B팀에서 샤를로트의 여동생 소피 역으로 분한 소프라노 홍혜인이다. 그는 단단하면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음색으로 자칫 침잠하기 쉬운 비극적 서사에 싱그러운 생기를 불어넣으며, 관객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에서 소피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홍혜인(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에서 소피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홍혜인(B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음악적 완성도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이끈 지휘자 홍석원의 손끝에서 맺어졌다. 홍석원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마스네 특유의 선율미를 섬세하게 조율해 나가며, 전막에 걸쳐 오케스트라의 밀도를 효과적으로 끌어냈다.

특히 1·2·4막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사랑의 테마‘에서 첼로 수석 이경진이 빚어낸 서정적 솔로 선율은 객석의 숨소리마저 멎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과잉되지 않은 절제미 속에서도 깊고 서늘한 슬픔을 뿜어낸 그의 연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적 정서를 정확히 관통했다.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4막에서 노래하는 테너 이범주(A팀)와 메조소프라노 정주연(A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의 4막에서 노래하는 테너 이범주(A팀)와 메조소프라노 정주연(A팀) /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과 박종원 영화감독의 손에서 탄생한 베르테르는 샤를로트의 소극적인 사랑에 무너지는 나약한 패배자가 아니었다. 그는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던 사랑의 흔적을 확인한 순간, 그 찰나의 기억을 품고 기꺼이 환희 속에 죽음을 맞는 고결한 인간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 앞에서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은 비극을 넘어선 인간 존엄의 승리를 목격하게 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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