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선 발레계의 대모 두 사람이 기획한 특별 공연이 각각 무대에 오른다.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안무 지도를 해왔던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66)와 장선희 세종대학교 무용과 명예교수(65). 두 사람은 올해 모두 전임교수직에서 은퇴하면서 명예교수가 됐고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길목에 섰다. 그리고 국립극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공연을 준비했다.
창작 25주년 맞은 김선희 교수의 <인어공주>
"인어공주는 저와 제자들에게 아주 소중한 작품입니다. 이번 무대를 장식할 제자들 역시 국제 콩쿠르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미래에 더 빛날 영재들이지요." (김선희 교수)
김선희 한예종 명예교수는 2001년에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K아츠발레단(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로 이뤄진 발레단)의 <인어공주>를 올해 대폭 개정해 관객을 맞는다. 오는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동안 총 4번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인어공주> 창작 25주년을 맞이해 김 교수는 올해 공연의 음악과 무대, 의상, 안무를 재편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지난 11일 서초동 한예종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전막 서사의 창작 발레가 한국 발레계에 꼭 필요하다"며 "한예종 출신으로 유명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이 이 무대를 했어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 강호현, 보스턴발레단 채지영과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 전민철 등 인어공주를 거쳐간 면면도 화려하다. 지난 2018년 인어공주가 뉴욕 맨해튼에서 공연됐을 때에는 김기민이 왕자로 나서면서 세계 발레팬들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올해 공연을 위해 한예종 출신의 안무가겸 교수인 유회웅이 안무를 다시 짰고, 무용원 김현웅 교수도 창작에 힘을 적극 보탰다.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였던 김현웅 교수는 2001년 초연부터 10여년동안 왕자역을 도맡았던 적이 있다. 한편 무용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인기몰이 중인 무용수 강경호 발레리노는 '마법 문어'로 함께 하며 '씬스틸러'가 될 전망이다. 무대에서 마법 문어에 대한 서사가 짙어진 점도 올해 공연의 특징이기 때문. 무대 연출은 공연예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재희가 맡았다.
김선희 교수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곡가 안톱 룹첸코가 올해 공연을 위해 인어공주의 음악을 다시 작곡했고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의상을 디자인하는 타티아나 노기노바가 힘을 보탰다"고 했다. <인어공주>를 세계적인 레퍼토리로 끌어올리기 위해 김 교수가 지난 연말부터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하며 이들과 접촉한 결과다. 음악은 한예종 졸업생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아 클래시카 크누아가 담당한다. 인어 역은 손민지·김민진이, 왕자 역은 이강원·성재승이 맡는다.
※발레 <인어공주>
2001년 창작된 서사 중심의 한국 전막 발레다. 스토리 라인은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흡사하다. 육지, 바닷속 등을 표현한 무대와 무용수들의 춤만으로도 내용을 충분히 따라가며 볼 수 있다. 바닷 속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인어공주가 인간 세상을 갈망하며 벌어지는 사건이 줄거리지만 발레 <인어공주>에서는 인어의 심리와 변화, 그리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그려낸 점이 두드러진다. 안데르센의 원작과 달리, 바다 세상은 동양적인 풍경으로 꾸며지는데, 바다의 왕은 '용왕'으로, 인어공주는 용왕의 딸로 나온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느끼는 장선희 교수의 <호두까기 인형>
장선희 세종대 명예교수는 2012년부터 서울 버전으로 개작한 크리스마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국립극장에서 선보인다. 나루아트센터에서 조그맣게 시작했던 이 작품은 장선희발레단(세종대학교 학생들로 이뤄진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국립극장에서 처음 공연했던 2023년에는 전석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올해 공연은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호두까기 인형 in Seoul을 타이틀로 열린다.
"해외에서는 12월이 아니더라도 <호두까기 인형>을 무대에 올려요. 10월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와보세요."(장선희 교수)
장선희 교수는 "어린이들이 즐거워하는 공연이지만, 어른에게도 꼭 필요한 동심을 일깨워줄 요소로 가득찬 무대"라고 공연의 의의를 전했다. 공연 제목에서도 짐작이 가능하지만, 배경은 19세기 유럽이 아닌 21세기 서울이다. 과자의 나라에 등장하는 군것질 거리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꾸민다는 게 장 교수의 설명. 지금 우리 어린이에게 가장 친숙한 배경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그는 "철저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1막과 2막으로 나뉘는 원작을 쉬는 시간없이 80분 미만으로 과감히 압축했다"고 했다. "1막 끝부분 눈의 나라에서 2막 초입 과자의 나라로 넘어갈 때, 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 관객과 캐롤을 부르면서 관객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듬뿍 느끼도록 했어요. 뒤에서는 부지런히 무대 위에 쌓인 눈송이를 치우지만 그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짜여져 있죠.(웃음)"
무대 미술도 동심을 자극할 요소로 가득 채웠다. 쿠키와 사탕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바퀴가 달린 침대가 무대를 사방팔방 가로지르는 건 예삿일. 호두까기 병정과 생쥐들의 전투 장면에서는 선물 상자들이 공중을 오르내리며 극적 긴장감을 배가했다. 장 교수는 "아이들이 발레 무대를 하나의 놀이터처럼 느끼길 바랐다"며 연출 배경을 밝혔다.
<호두까기 인형 in Seoul>에선 주인공 클라라의 설정에도 약간 변화가 있다. 러시아 마린스키극장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원전으로 본다)에선 어린 클라라가 1막에 등장하고 2막부터는 어른 클라라가 꿈속에서 호두까기 왕자와 모험하는 내용을 그린다. 하지만 장선희발레단의 어린 클라라는 극을 지속적으로 이끌며 어린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게끔 했다. "어린 클라라가 현실과 꿈의 세계를 잇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거에요. 이점이 기존 발레단들 공연과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이유림과 이고르 콘타레프는 이번 공연에 객원 주역으로 각각 클라라와 호두까기 왕자를 연기한다. 그러나 장선희발레단 무용수들의 기량도 프로에 뒤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 불가리아발레단에 초청받아 지난 겨울 클라라로 활동했던 수석 무용수 홍서연(세종대 4년)을 비롯해 세종대학교 출신의 무용수들이 대거 참여한다. 장선희 교수는 "학생들이라고 해서 프로가 아니라는 편견은 버리셔도 된다"며 "국제 콩쿠르에서 주목받고 해외 발레단의 러브콜을 받았던 실력자들이기에 더욱 기대해주셔도 좋다"고 말했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
18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된 고전 발레다. 차이콥스키가 발레 음악을 작곡했으며, 무대에 흐르는 이야기는 독일 작가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마린스키극장의 수석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를 만들었고 차석 안무가였던 레프 이바노프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원전을 만들어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 작품은 국내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이 마린스키극장 버전으로 매년 공연을 올린다. 국립발레단은 볼쇼이 발레의 안무가였던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수정 버전으로 공연한다. 호두까기 인형은 발레 대중화에 가장 기여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가족 중심의 정서가 있는 나라에서는 특히 인기가 높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