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농부의 아들" 싸리비를 든 이배 작가, 8m 숯 기둥이 솟았다

6 days ago 20

고향 청도에서 가져온 흙을 빗자루로 쓸며 전시의 서막을 연 이배 작가.  뮤지엄 산 제공

고향 청도에서 가져온 흙을 빗자루로 쓸며 전시의 서막을 연 이배 작가. 뮤지엄 산 제공

“빗자루로 흙을 쓰는 것은 근원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자, 마음을 쓸며 의지를 다지는 일입니다.”

봄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지난 6일 강원도 원주시 뮤지엄 산. 바지를 걷어 올린 맨발 차림의 이배 작가(70)가 커다란 싸리비를 들고 나타났다. 흙으로 뒤덮인 무대에 올라선 그는 빗자루를 붓 삼아 땅 위에 흔적을 새겼다. 그의 뒤 9m 높이의 스크린에서는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 작품의 제목은 ‘논 퍼포먼스’. 뮤지엄 산에서 열리고 있는 이배 작가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 ‘En attendant(앙 아탕당): 기다리며’의 시작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작가가 밟고 선 흙은 그의 고향 청도에서 가져왔다. 무대 역시 고향의 논을 본떠 축소판으로 만든 것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30여 년 예술 세계에 헌신한 ‘숯의 작가’가 그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 영상 등 39점이 전시장 곳곳에 걸렸다.

“이번 전시는 근원부터 다시 돌아보는 데 집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엇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는지 되짚었습니다. 스스로를 재확인하는 시간이었고, 예술을 통해 하나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전시장에 만든 논에서는 전시 기간 다양한 식물이 자라나고 죽으며 땅과 신체, 시간의 순환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배 작가는 “강릉 산불 현장에 가보니 산을 오르는데 흙이 무릎까지 들어갈 정도로 모든 것이 다 타 있었고, 놀랍게도 그 땅에서 개미가 올라왔다”며 “농부는 땅을 일구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기도만 하게 된다. 이번 전시도 그런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기다리며’라는 전시의 제목도 이와 연결된다. 이배 작가는 “기다림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일종의 염원”이라며 “완결되지 않고, 부족하고, 모자란 아쉬움을 가진 마음”이라고 했다. 그 말에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태도가 묻어난다.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대표 작가지만 그는 “내가 예술가라고 하지만 얼마나 예술을 이해하나 돌아봐야 했다”며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내내 자신이 없었고 절망적이며 캄캄했는데, 이런 마음이 ‘기다리며’라는 제목을 낳았다”고 고백했다.

실내는 물론 야외 공간에 전시된 작품들은 강원도 치악산과 크고 작은 봉우리의 능선,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공간과 어우러진다. 관람객은 본관 입구에서 시작해 갤러리 로비와 청조갤러리 1, 2, 3을 거쳐 야외 ‘무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개의 공간을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본관 입구에 전시된 ‘불로부터’.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뮤지엄 산 제공

본관 입구에 전시된 ‘불로부터’.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뮤지엄 산 제공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스무 번도 넘게 전시장을 찾았다. 모든 계절을 경험하며 자신의 본질과 현실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본관 입구에서부터 압도적인 스케일로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불로부터(Issu du feu)’. 지난 2023년 뉴욕 맨해튼의 중심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높이 8m, 지름 5m, 무게 7t에 달하는 새까만 숯 기둥은 작가의 고향 청도에서 보던 고인돌에서 영감을 얻었다. 느티나무로 만든 이 숯은 청도의 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숯을 만드는 과정 역시 기다림의 연속이다. 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마에 적당한 온도의 불이 오르기까지 2주, 숯을 식히는 데만 2주를 포함해 꼬박 한 달이 걸린다.

야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브론즈 조각 ‘붓질(Brushstroke)’이다. 전시의 마지막 동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작품은 높이만 10m가 넘는다. 뮤지엄 산 건물과 주변 산세의 높이와 호응하도록 제작된 이 조각을 설치하기 위해 집을 짓듯 3m 이상의 바닥을 파내야 했다고.

청조갤러리 로비에는 벽에 걸려 있어야 할 회화 작품들이 마치 설치 작품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 공간에 소개된 총 16점의 작품은 작가의 체중과 붓질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표현됐다. 또, 모두 같은 검정처럼 보여도 먹을 만든 숯이 어떤 나무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색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 역시 작가처럼 맨발로 걸어야 하는 전시장도 있다. 청조갤러리 1 ‘White’와 청조갤러리 2 ‘Black’전시장에선 신발을 벗거나 신발 위에 덮개를 씌워야 한다.

검은 숯과 하얀 종이가 대비되는 두 공간에서는 작가가 뮤지엄 산 현장에 매일 새벽 4시마다 나와 작업한 작품을 자세히 볼 것. 3만5000개의 스테이플러 심을 벽에 박아 붓의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이 그것이다. 그는 “연필로 그린 것처럼 엷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하나하나 철사가 보이는 역동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며 “흰색 벽에 핀이 박히면서 물성과 비물성이 만나는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의 전시장은 그의 작업실이자 고향인 경북 청도와도 이어진다. 청도의 대산저수지 위엔 그의 붓질을 형상화한 조각이 부유하듯 떠 있다. 전시장에서는 실시간 송출되는 영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원주=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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