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금으로 이해하는 세계[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1 day ago 2

이기진 교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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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아빠 키가 줄어든 것 같은데.”

나는 중학생 때 성장이 멈춘 뒤로 줄곧 키가 165cm다. 딸아이 키가 커진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지만, 어쩌면 정말로 내 키가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키가 줄어든다. 척추뼈 사이의 디스크 연골이 얇아지고 뼈 밀도가 감소하고 근육이 약화되면서 40세 이후부터 키가 줄어든다. 안타깝게도 물리학적 중력의 힘과 생물학적 노화가 만들어낸 작품인데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길이의 단위인 1m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정했을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이 표준단위들은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함께 만들어 온 합의의 산물이다.

1m라는 기준은 1799년 프랑스혁명이 막을 내릴 무렵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나라와 지역, 심지어 종교에 따라 길이 단위가 달라 분쟁이 생기곤 했다. 성인의 발 크기를 기준으로 삼는 ‘피트’, 엄지손가락 너비를 기준으로 한 ‘인치’, 팔 길이를 기준으로 한 ‘엘’은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양팔을 벌린 길이(약 1.8m)처럼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한 단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말의 하루 주행 거리와 같이 공동체의 생활 경험에서 유래한 단위도 있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가 기준이 되는 단위, ‘척’을 썼다. 1척은 약 30.3cm이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쓸 수 있게 백금으로 만든 1m 원기를 제작했다. 1m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의 자오선 길이의 1000만분의 1로 정의됐다. 비록 지구가 완벽한 구형이 아니어서 측정에 한계가 있었지만 이 길이를 바탕으로 표준 미터 원기가 만들어졌고, 전 세계에 보급되며 동일한 1m 단위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1983년 우주 시대에 발맞춰 1m 표준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빛이 진공 상태에서 특정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변화하는 백금 막대가 아니라 절대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삼았기에, 먼 우주의 거리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질, 양자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측정할까? 자로 잴 수도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0에 가까운 이 ‘양자 거리’를 국내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실험적으로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양자는 특정 순간에 다른 전자들과의 위치에 따른 다른 위상차를 갖는다. 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팀과 양범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팀은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두 전자 사이의 위상차를 측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학적 계산을 통해 양자 거리를 정밀하게 계산했다. 이 기술은 양자컴퓨터, 양자통신 등 양자 정보의 시대에 필요한 핵심 기술이다. 측정은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끈질긴 측정은 우리를 늘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인류는 또 무엇을 잴까. 어쩌면 그것이 아직 상상도 하지 않은 세계의 문을 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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