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현대화랑의 비밀…'실험미술'과 '디아스포라 작가'로 세대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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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태의 실험, 그리고 디아스포라

미술에도 시대정신이 있다. 장강의 앞 물결을 뒷물결이 밀어내는 것처럼 늘 새로운 사조와 담론, 미학이 탄생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독창적인 세계관을 제시해낸 작가가 위대한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도 명문 취급을 받는 화랑의 조건도 비슷하다. 한발 앞서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는 화랑만이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받기 마련이다.

해방 후 한국미술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1세대 모더니스트들이 서양미술을 소개하고, 세계 미술계와의 간극을 줄이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시간이 흘러 세기 전환기를 앞둔 1990년대 들어선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미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 과제에 도전한 건 해방 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당대 서양 첨단 작업에 영향을 받은 실험·개념 미술가들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세계를 누볐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다.

갤러리현대의 2막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국 미술시장의 산파 역할을 한 박명자 회장이 2006년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전부터 경영에 관여해 온 둘째 아들 도형태(56) 갤러리현대 부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며 세대교체에 시동을 걸었다. 미국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과 교분을 나눴던 도 부회장은 ‘한국 실험미술 다시 보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다음 달 22일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개막하는 55주년 특별전의 2부 전시가 도 부회장의 취향이 담긴 실험미술, 디아스포라 작품으로 채워진 이유다. 전시는 작가 12명의 작품 180여점을 선보인다.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전시 전경 /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전시 전경 /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 곽덕준: 디아스포라 실험

신관 지하에 걸린 곽인식(1919~1988)과 곽덕준(88)의 작품이 관람의 시작을 알린다. 두 작가는 한국 실험미술 선구자인 동시에 일본에서 작업활동을 한 ‘재일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전시에선 곽덕준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찬사를 받았던 개념미술이 아닌 회화작품이 걸렸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3년여간 제작한 페인팅은 평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기모노를 염색하는 방식으로 색을 심은 게 특징이다. 언뜻 보면 인체해부도 같기도 한데, 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한국인으로 겪은 냉소와 조롱을 견디려는 씁쓸한 유머를 담고 있다. 미국 타임지 표지에 실린 미국 대통령 사진을 자기 얼굴과 담아낸 사진 연작인 ‘대통령과 곽’도 큼지막하게 걸렸다. 제럴드 포드부터 버락 오마바까지 작업했는데, 온전히 10개 작품을 모두 소장한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갤러리현대밖에 없다.

곽덕준, 카터와 곽, 1977, C-프린트, 150 × 105 cm

곽덕준, 카터와 곽, 1977, C-프린트, 150 × 105 cm

성능경: ‘신문읽기’ 2025 ver.

한국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을 대표하는 성능경(81)은 갤러리현대가 백아트, 리만 머핀과 함께 발굴해낸 흙 속의 진주 같은 작가다. 팔순 넘어 생애 세 번째 상업화랑 전시를 갤러리현대에서 진행한 그는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가장 대표적인 작업인 ‘신문읽기’가 새롭게 재해석돼 걸렸다. 지난해 12월 벌어진 계엄령 사태가 대서특필된 종이신문을 읽은 결과물을 새롭게 내놓은 것. 이 작업을 통해 역사의 증인으로 살고자 했던 예술관을 집약적으로 느낄 수 있다.

성능경, 현장 엎드려 뻗쳐!,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콜라주, 54 × 865 cm Framed 74 × 108 × 4 cm

성능경, 현장 엎드려 뻗쳐!,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콜라주, 54 × 865 cm Framed 74 × 108 × 4 cm

■ 이승택과 백남준: 예술을 대하는 태도

전시장 2층에는 이승택(93)의 ‘비조각’ 캔버스 연작이 벽면을 메웠다. 팔순을 넘긴 2015년 버려진 물건, 골동품상에서 수집한 오브제적 재료로 제작한 시리즈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백남준(1932~2006)의 로봇 조각 ‘프랑켄슈타인’과의 대비가 재밌다. 이승택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태도로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적인 물건을 현대미술로 승격시키려 했다면, 백남준은 첨단 기술을 사용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려 하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승택, 무제, 1990s-2010s, 캔버스에 복합매체

이승택, 무제, 1990s-2010s, 캔버스에 복합매체

이건용과 이강소: 사유의 순간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층에 걸린 이강소(82)와 이건용(83)의 회화 작품들이다. 한국실험미술의 거장이자, 미술시장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작가의 신작이 나란히 걸린다. 1970년대를 전후해 실험미술이 전국적 규모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작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강소가 ‘실존하는 세계는 고정돼 있지 않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려 무한대로 열린 해석의 공간을 관람객에게 내준다면, 이건용은 논리적인 의도를 갖고 엄격하게 의도와 표현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회화를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지만, 평생 미술로 사유하려 했던 두 대가의 내공을 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건용, Bodyscape 76-1-2025,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91 × 117 cm

이건용, Bodyscape 76-1-2025,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91 × 117 cm

이강소, 바람이 분다 240932,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 × 130 cm

이강소, 바람이 분다 240932,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 × 130 cm

오래 가는 화랑 비결은

50년을 넘긴 갤러리들은 단순히 상업공간을 넘어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 역사적 공간, 혹은 ‘작가들의 두 번째 작업실’로 평가받는다. 한국은 물론 국제 미술시장을 주름잡는 미국, 유럽 등에서도 오랜 역사를 이어온 갤러리는 손에 꼽는다. 마르크 샤갈 등 프랑스 파리 예술가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매그 갤러리(1945년 설립), 전후 일본 현대미술과 아시아 미술의 허브 역할을 한 도쿄화랑(1950년 설립) 정도가 대표적이다. 세계 4대 화랑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의 가고시안 갤러리도 1980년 설립돼 아직 50돌을 맞이하지 못했다.

잘 나가는 화랑은 많지만, 오래 가는 화랑은 많지 않은 이유가 뭘까. 대개 창업주가 작고하면 화랑의 지켜온 철학이 이어지지 않거나, 세대교체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창업주의 인맥과 인적 네트워크에만 의존하다가 미술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게 결정적인 실수다. 미니멀리즘을 내세워 뉴욕 소호와 첼시 갤러리의 시대를 연 전설적 갤러리스트 폴라 쿠퍼가 최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해외 미술계 역시 지속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점에서 갤러리현대의 세대교체 연착륙은 미술계 안팎에서 흥미로운 주제다. ‘가장 최신의’ 라는 뜻을 담은 화랑의 이름을 정체성으로 삼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취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뭇 다른 모자의 예술 취향은 입맛에서도 드러난다.

갤러리현대 [좌]박명자 회장과 [우]도형태 부회장 / 사진출처. 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 [좌]박명자 회장과 [우]도형태 부회장 / 사진출처. 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는 2004년 사간동 화랑 신관 옆 건물을 인수해 이탈리안 레스토랑 ‘두가헌’을 운영 중이다. 청전 이상범의 수묵화 등이 걸린 이 곳은 한국 컬렉터 입맛을 고려한 게 특징으로, 박명자 회장의 색깔이 강하다. 반면 도형태 부회장이 지난해 잠시 운영했던 서울 청담동의 ‘에밀리오’는 보다 과감하다. 라이언 갠더의 설치 등 현대미술 작품이 걸렸던 이곳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현지의 입맛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두 레스토랑이 이탈리안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 다른 취향을 보여준 건, 현직 대표의 심미안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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