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12단 제품의 엔비디아 품질테스트를 통과했다. 지난해 2월 HBM3E 12단 개발을 완료한 지 1년6개월 만이다. 삼성이 기존 HBM3E를 뜯어고쳐 성능을 개선한 것과 엔비디아의 부품 공급업체 다변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이 HBM 기술력을 상당 부분 되찾은 만큼 6세대 HBM(HBM4) 개발·납품 경쟁에서도 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D램 재설계로 발열 잡아
1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최근 엔비디아의 HBM3E 12단 품질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D램 12개를 쌓아 데이터 처리량을 극대화한 HBM3E 12단은 엔비디아의 B300, AMD의 MI350 등 인공지능(AI) 가속기에 들어가는 최신 HBM이다. 삼성은 AMD는 뚫었지만 엔비디아 벽은 넘지 못했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HBM3E 8단 및 12단 제품을 엔비디아에 납품하기 위한 과정에서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 10월께 진행된 HBM3E 8단 품질테스트는 통과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갑자기 주문이 연기됐다. 경쟁사보다 한 세대 구형인 10나노미터(㎚·1㎚=10억분의 1m) 4세대 D램(1a D램)을 HBM3E의 코어 다이(기본 재료)로 넣은 탓에 엔비디아의 깐깐한 발열 관련 요구 성능을 맞추지 못한 탓이다.
이랬던 삼성이 8단보다 고성능인 12단 제품으로 엔비디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1a D램 재설계를 통해 발열 문제를 잡은 덕분이다. 승부수를 던진 건 지난해 5월 반도체(DS)부문장으로 취임한 전영현 부회장이었다. 올해 초 엔비디아 경영진과 만난 뒤 ‘HBM3E용 1a D램 재설계’를 지시했고, 배수진을 친 HBM개발팀이 발열 문제를 해결했다.
검증을 끝낸 엔비디아가 삼성에 주문을 넣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삼성을 추가 공급사 리스트에 올리면 단가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납품 물량은 많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이은 세 번째 공급사여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에 HBM3E 12단은 자존심 문제였다”며 “매출에 큰 도움이 안 되더라도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HBM3E 12단 제품을 납품하는 데 대해 “고객사 일정에 맞춰 프로세스 진행 중”이라고 공식 입장을 내놨다.
◇HBM4 동작 속도 우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 ‘빅3’의 다음 승부처는 HBM4다. HBM4는 엔비디아가 내년 내놓는 인공지능(AI) 가속기 ‘루빈’에 들어간다. HBM4 납품 경쟁은 HBM3E와는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이 경쟁사보다 한 단계 높은 공정으로 승부해서다. 삼성은 HBM4에 10나노 6세대 D램(1c D램)을 투입하는 반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HBM3E에 넣은 1b D램을 HBM4에도 투입한다. 삼성은 두뇌 역할을 하는 로직 다이를 4㎚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정으로 만들지만,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대만 TSMC의 12㎚ 공정을 활용한다. 스펙만 보면 삼성이 한 수 위인 셈이다.
엔비디아가 최근 루빈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HBM 업체에 “데이터 처리 속도를 초당 10기가비트(Gb) 이상으로 높여달라”고 요청한 것도 삼성에는 호재다. 삼성이 구현한 속도(11Gb)가 SK하이닉스(10Gb 안팎)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은 엔비디아의 요구를 못 맞춰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달 엔비디아의 HBM4 요구 성능을 맞춘 샘플을 납품할 계획이다.
황정수/김채연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