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혁신 기술의 등장과 투자 열풍, 버블 논쟁
1990년대 인터넷 기반 新경제 시기와 닮아
탈세계화, 고령화 등 경제여건은 더 나빠져
30년 전 연준의 功過에서 교훈 되새겨야
그는 연준을 이끌면서도 꽉 막힌 ‘경제학 너드’ 이미지와 반대로 이론보다 현장을 중시하고 현실 경제에 관심을 둔 시장형 중앙은행가로 자리매김했다. 젊은 시절엔 경제 컨설팅 회사를 차려 20년간 대기업과 고액 자산가들의 사업 및 투자 결정을 도왔다. 그는 순식간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예측가, 최고경영자(CEO)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컨설턴트로 우뚝 섰다. 그렇게 쌓인 실무경험과 혜안을 바탕으로 그린스펀은 1990년대 인터넷 기술 혁명발(發) 고도 성장으로 정의되는 ‘신경제(New Economy)’의 도래를 포착해 냈다. 연준 의장으로서 18년간 4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선제적이고도 정교한 통화 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초호황기를 이끈 것이다. 다만 그는 시장의 자정 능력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적절한 시장 규제와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과도한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 거품을 키워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시켰다는 지적에서 그는 자유롭지 않다.
그린스펀을 떠올리는 것은 단지 며칠 전 그의 부고를 접해서만은 아니다. 그가 세계 경제를 이끌었을 때와 지금의 시대 상황이 놀랄 만큼 유사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인터넷 기술이 모든 걸 바꾼다”는 믿음이 생산성 혁명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지금도 주어만 ‘인공지능(AI)’으로 바뀌었을 뿐 신기술이 우리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란 희망은 더욱 확고하다. 소수의 테크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점(1990년대 MS 시스코 인텔, 지금은 엔비디아 스페이스X 오픈AI), 그런 기업들에 대한 투자 열풍이 일종의 ‘사회 현상’처럼 됐다는 점도 비슷하다. 심지어 그에 따른 시장 과열과 버블 논쟁마저 닮은꼴이다.
세계 경제를 고도 성장으로 이끌면서 동시에 큰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던 그린스펀의 양면성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AI에 따른 성장 가능성을 믿되, 닷컴버블이나 금융위기 같은 대형 충격을 피할 수 있는지.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재정을 풀되,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동성 관리가 가능한지. 경기 호황에 따른 과실을 배분하되, 투자자들이 과도한 도박에 빠지는 걸 방지할 수 있는지. 거대한 기술혁명의 파도 앞에서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이에 대해 자신 있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게다가 지금은 1990년대보다 여러모로 더 불리한 상황이다. 당시는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만개하기 시작했으며 젊은 노동인구 비중이 높았던 시기다. 경제성장을 위한 최적의 여건이 갖춰졌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과 탈세계화로 공급망 리스크가 상시화됐고, 인구 고령화와 정부 부채 급증이라는 역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AI 기술로 생산성이 늘면 물가가 안정돼야 하지만 전 세계가 오히려 더 심한 인플레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진정한 산업혁명인지, 아니면 장밋빛 낙관이 만들어 낸 거품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가 걱정된다면 30년 전 호황의 결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정보기술(IT) 산업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닷컴버블의 붕괴로 이어져 수많은 기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인터넷은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기술이었고, 그런 엄청난 충격 뒤에도 기술 진화가 거듭돼 전자상거래, 소셜미디어, 모바일 등으로 혁신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같은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AI를 내세운 모든 기업이 성공하진 못하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AI는 결국 산업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추진체가 될 수 있다. 경계심과 인내심을 갖추되, 신기술이 가져올 생산성 혁명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같은 AI발(發) 신경제의 부활을 조심스럽게 꿈꾸는 것은 지금의 연준도 마찬가지다.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은 얼마 전 취임식에서 “앨런 의장이 했던 방식 그대로 의장직을 수행해 나갈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제2의 그린스펀’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워시가 그린스펀의 유산에서 교훈을 얻어 또 다른 ‘경제 마에스트로’가 될지, 아니면 다시금 그의 전철을 밟을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유재동 부국장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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