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서 최고 권위의 상은 뭘까. 전통과 비평가의 권위가 담긴 ‘그라모폰 어워즈’나 ‘디아파종 도르’를 뽑을 만하겠지만 대중 의견도 담은 최고 상을 꼽는다면 ‘BBC 뮤직 매거진 어워즈’가 빠질 수 없다.
이 시상식에선 BBC 뮤직 매거진에 한 해 동안 실린 앨범 1500여개 중 300여개를 주최 측이 우선 추린다. 이어 외부 전문가가 포함된 심사위원단이 분야별 명반 3개를 다시 가린다. 이 3개 중 온라인 투표에서 가장 많이 득표한 앨범 1개가 최종 선정된다. 지난해 임윤찬이 ‘올해의 앨범’ 등 3관왕을 휩쓴 그 시상식이다.
‘올해의 앨범’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상은 온 세상 악단이 경쟁하는 ‘올해의 관현악’이다. 지난달 열린 올해 시상식에선 프랑스 페이 드 라 루아르 국립 오케스트라의 앨범이 이 상을 탔다. 명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말러 교향곡 7번 녹음본과 같은 쟁쟁한 후보를 제친 성과다.
이 앨범을 녹음한 지휘자는 사샤 괴첼. 울산시립교향악단의 2년 차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는 어떻게 프랑스의 지방악단으로 평론가와 대중 모두의 ‘톱 픽’이 됐을까. 지난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교향악축제의 폐막 공연을 맡았던 그를 직접 만났다.
프랑스의 지방 악단, 소외됐던 세기의 끝을 파고들다
상을 탄 괴첼의 앨범은 레퍼토리도 놀랍다. 앨범 제목은 <슈레커, 코른골트, 코레네크>. 모두 대중에게 익숙한 작곡가는 아니다.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나마 알려진 정도. 이들 3인은 양 세계 대전의 전간기에 정권 억압을 받으며 잊힌 오스트리아 작곡가란 공통점이 있다.
루아르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기도 한 괴첼은 음악가들도 잊고 있던 이들의 음악을 100여년 뒤에 되살렸다. “모든 게 급변하고 불확실성이 가득한 현시대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란 이유에서였다.
앨범은 슈레커의 작품으로 시작해 코른골트의 신포니에타 나장조로 이어진다. 마무리는 크레네크의 ‘포트푸리’가 맡았다. 이 구성은 악단과 괴첼이 3년 전부터 준비한 ‘팽 드 시에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프랑스어로 ‘세기말’을 뜻하는 팽 드 시에클은 19세기말부터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인다. 군주제가 무너지고 유럽이 전쟁의 공포에 떨던 혼란기다.
괴첼은 “유럽 문화가 방향성을 잃었던 시기에 이들 작곡가는 사람들의 영혼에 말을 건넸다”며 “이번 수상은 우리에게 인류애를 되찾아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권 억압으로 사라진 예술 유산을 소생시키는 작업을 비평가와 관객 모두가 인정해줬다는 점에서다.
괴첼은 프로젝트 두 번째 앨범도 녹음하고 있다. 첫 앨범이 잊힌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같은 시기 프랑스 파리를 파고든다.
“여기서도 드뷔시나 라벨 같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작곡가를 다루려 합니다. 2년 뒤 세 번째 앨범에선 아포칼립스로 넘어갈 겁니다. 1938년엔 인류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끝장날 수도 있단 생각이 팽배했잖아요. ‘종말의 도시’를 주제 삼아 당시 작곡가들이 종말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살펴볼 겁니다. 종말을 향해 가더라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죠.”
“축구 감독처럼 단원 포지션 별로 훈련시켜야”
괴첼은 지역 악단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11년간 튀르키예의 보루산 이스탄불 필하모닉을 이끌면서 이 악단을 BBC프롬스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울산시향의 실력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괴첼은 감독 부임 후 1~2년은 지역과 사람을 이해하며 악단과 신뢰를 쌓는 데 집중한다. 음악에 침잠하는 건 그 다음이다. “울산에 지난해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건 지역 분위기를 느껴보는 일이었어요. 이스탄불에서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등을 돌면서 도시 문화를 체험했듯 어제도 한국의 사찰에 갔어요.”
악단 고유의 음색을 만드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악단이 들려주는 소리를 바꾸려면 15~20번은 공연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화하는 레퍼토리는 모자이크 예술과 비슷합니다. 몇 주 전 튀르키예 에페소스에 있는 유적지에서 모자이크로 처리된 바닥을 봤어요. 수많은 돌 조각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게 지휘자의 일과 닮았더라고요. 개별적으로 연주한 한 곡 한 곡이 모여 하나의 예술을 이루는 거죠. 프랑스에서도 이런 과정을 거쳤어요.”
더 구체적으로 악단 음색을 내는 과정에 대해 물었다. “지휘자는 축구 팀의 코치와 같습니다. 전 어릴 때 축구를 많이 해서 축구 선수와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할 정도였어요. 훌륭한 코치는 팀을 관찰한 뒤 포지션 별로 훈련 시켜요. 악단도 마찬가지죠. 오보에, 트럼펫, (바이올린) 악장에게 주는 사인은 저마다 달라야 합니다. 이렇게 각각에 맞는 방식으로 연주자가 직접 차이를 경험해야 소리가 몸에 익습니다. 시간이 걸려요. 축구 감독이 강팀을 금방 만들 수 없는 것처럼요.”
여담으로 그는 축구 선수일 땐 10여미터를 순식간에 치고 나오는 폭발력을 살려 오른쪽 윙을 맡았단다. 경기 중 부상을 입어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울지를 깨닫고선 음악의 길로 갔다고. 괴첼은 곧 열릴 월드컵에서 모처럼 활약하게 된 오스트리아의 경기를 고대하고 있다.
“무대 위 예술가는 비교 두려워해선 안 돼”
수비수의 예상에서 벗어나 골을 노리는 공격수처럼 괴첼은 세상이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악단에서 기회를 포착한다.
“루아르 오케스트라도, 울산시향도 재능 있는 음악가가 많은데 저평가를 받고 있었어요. 이게 제가 감독직을 수락한 이유였죠.”
그의 합류로 울산시향 공연은 종종 매진을 기록할 만큼 흡입력이 생겼다. 지난달엔 이 악단이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의 마지막 공연을 맡았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한 인간의 고뇌를 담은 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으로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다뤘다. 마지막엔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를 연주해 아이러니를 인류 역사의 층위로 넓혔다.
지방의 여러 악단이 한 공연장에서 날짜를 바꿔가며 연주하느라 경쟁적으로 보일 수 있는 교향악축제의 형식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이다.
“공연들을 비교해보며 ‘이 악단이, 이 곡이 더 좋다’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대 위의 예술가는 자신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다를 수 있죠. 이 축제가 한국 오케스트라 문화의 다양성을 기념하는 멋진 장으로서 이어졌으면 합니다.”
괴첼은 오는 29일 울산시향의 250번째 정기연주회를 지휘한다. 베르디의 ‘레퀴엠’을 통해 인간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여정을 표현한다. 7월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연주한다. 고전이 된 작품들로 악단의 실력을 끌어올리고자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교향악축제에서 익혔던 브람스 음악 접근법을 체득시키려는 의도도 있다.
“이제 울산시향 감독으로서 두 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습니다. 무대 위의 에너지가 달라진 걸 관객 모두가 느끼실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관객과의 소통입니다. 울산 관객들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돌아와 줘 반갑다’는 듯 환영해줍니다. 곡마다 반응이 다르지만 언제나 열정적이란 건 같아요. 악단은 눈앞의 악보만 보는 게 아니라 작곡가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연주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지휘자도 무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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