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사회의 여왕 자격 [서광원의 자연과 삶]〈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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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인도의 유명한 생물학자 라가벤드라 가다그카르가 한창 말벌 사회를 연구할 때의 일이다. 관찰하던 말벌 중 두 마리가 눈길을 끌었다. 여왕의 다음 후보자감으로 보여서였다.

둘은 성향이 완전히 달라서 그런지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틈만 나면 못살게 굴었다. 가다그카르는 말벌들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몸에 특정한 색깔을 칠한 다음, 그 색깔로 이름을 정했는데, ‘파랑’을 괴롭힌 건 ‘빨강’이었다. 파랑 역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 둘이 엉겨 붙어 싸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여왕벌이 중간에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곤 했다.

만약 여왕이 없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음 여왕은 당연히 빨강일까? 궁금한 가다그카르가 어느 날 여왕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파랑이 새로운 여왕이 됐다. 분명 공격적인 빨강이 압도적인 우세였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심통이 난 듯한 빨강은 한동안 먹이를 축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가다그카르가 이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건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같은 종의 다른 말벌 군집에 비슷한 상황이 생겼다. 여기서는 파랑이 못된 행동을 하는 편이었고 오렌지는 당하는 쪽이었다. 역시나 가다그카르의 호기심으로 인해 여왕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파랑이 새로운 여왕이 됐고 오렌지는 축출됐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예상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뜻밖에도 구성원인 말벌들이 ‘태업’을 시작했다. 다들 먹이 구하는 일을 하지 않고 벌집 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 밖으로 나가서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파랑이 여왕 본연의 역할인 알 낳기를 위해 공간을 만들려 해도 재료를 가져다주는 말벌 역시 없었다.

왕이든 여왕이든 구성원이 있어야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도 꿈쩍하지 않자 파랑은 결국 떠나야 했고 가끔 상황을 살피는 듯 들르곤 했던 오렌지가 새로운 여왕이 됐다. 그러자 태업을 벌이던 말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이를 구해 오고, 한창 자라는 애벌레들의 방을 확장했으며 새로운 여왕이 알을 낳도록 재료를 가져다 새로운 공간을 지었다. 떠났던 파랑은 혼자 살 수 없어서인지 다시 돌아왔지만 다른 벌들에게서 마치 화풀이 같은 혹독한 고초를 치른 후에야 받아들여졌다.

흔히 벌과 개미들을 초유기체라고 한다. 누가 시키거나 지휘하지 않는데도 분업 구조를 통해 수천, 수만 마리가 마치 하나의 몸처럼 수많은 일을 거의 동시에, 그것도 빠르게 해치워서다.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돼 그렇다고 하지만 가다그카르의 연구는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뇌는 이 문장 끝에 있는 마침표만 하거나 조금 더 큰 정도지만 그럼에도 어떤 존재가 자신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가다그카르가 이들에게도 ‘정치’가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레이스가 시작됐다. 우리 모두가 나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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