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전남)=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여름은 입맛에서 시작된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계절, 전남 장흥의 밥상은 계절보다 먼저 여름을 데려온다. 들녘을 넘어온 바람이 장독대에 머물고, 깊은 장맛은 마을 어귀까지 퍼진다. 바다에서는 갯장어가 오르고, 산에서는 표고버섯이 내려온다. 그 모든 것이 한 상에서 만난다.
장흥은 한반도 남쪽 끝자락, 산과 바다, 숲과 들이 모여 사계절의 식탁을 빚어내는 땅이다. 이 고장에서는 음식이 곧 풍경이고, 그 풍경은 이곳에서의 삶을 말한다. 갯장어 샤부샤부 한 그릇에는 여름을 이겨내는 지혜가 담겨 있고, 구수한 된장국 한술엔 땅의 시간과 정성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장흥의 음식은 단순한 ‘별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 땅의 기억이고 땀이며, 이 고장이 축적해온 고유한 미식의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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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뫼바다의 ‘된장물회’ |
여름을 견디는 장흥의 방식, 된장물회
된장물회는 장흥 여름 식문화의 결정체다. 보기엔 얼음 띄운 찬 국물에 해산물을 담근 단출한 한 그릇이지만, 그 안엔 땅과 바다, 시간의 풍경이 담겨 있다.
장흥 사람들은 예부터 더운 날 땀을 흘린 뒤 물 대신 된장을 풀어 만든 냉국을 마셨다. 몸을 식히면서도 속은 챙기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 생활의 지혜는 시간이 흐르며 진화했고, 오늘날 된장물회로 이어졌다.
된장물회의 핵심은 국물이다. 장흥산 토종 메주로 만든 된장을 찬물에 풀고, 열무김치 국물과 매실식초로 산미를 더한다. 여기에 마늘, 청양고추, 들깻가루가 어우러지면 국물은 단순한 냉국이 아닌 발효와 계절이 겹쳐진 맛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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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뫼바다의 ‘된장물회’ |
그 안에는 계절별 해산물이 들어간다. 전어, 가자미, 백합, 갑오징어 등 장흥 앞바다에서 나는 재료다. 생선회나 데친 해산물 위에 국물을 붓고, 마지막엔 소면을 말아낸다.
맛은 단순히 시원한 것이 아니다. 된장의 구수함, 열무의 풋산미, 매실의 청량함이 겹겹이 밀려온다. 혀끝보다는 몸 전체가 서서히 식는 듯한 시원함이다. 장흥 된장이 품은 발효의 깊이, 여름을 견디는 사람들의 방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된장물회를 별미가 아니라 삶을 버티는 한 방식으로 기억한다. 된장물회 한 그릇엔 장흥의 기후와 자연, 그리고 손맛이 담겨 있다. 여름을 이기는 법,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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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다지회마을의 갯장어샤부샤부 |
남해서 올라온 여름의 단단함을 맛보다
갯장어는 예로부터 남해안 일대에서 귀하게 여겨졌다. 특히 장흥 앞바다는 모래, 자갈, 갯벌이 어우러진 복합 해저지형으로 갯장어가 잘 자라는 최적의 환경이다. 빠른 물살을 이겨내며 자란 장흥 갯장어는 육질이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고, 어민들은 그중에서도 가시가 연하고 살이 단단한 개체만을 선별해낸다.
이 갯장어의 진가는 샤부샤부로 가장 잘 드러난다. 얇게 썬 살을 뜨거운 육수에 살짝 담그면 하얗게 말리며 피어나는데, 그 찰나의 순간은 식감의 정수를 보여준다. 육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다. 황기, 녹각, 엄나무, 대추 등 약재로 만든 약선 육수로, 장흥의 여름 기후에 맞춰 기력을 보충하고 열을 가라앉히는 기능까지 갖췄다.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러움과 탄성이 동시에 밀려든다. 이중적인 식감은 장흥 갯장어만의 특징이다. 함께 곁들이는 부추, 양파, 미나리, 키조개 관자 등은 모두 이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로, 장흥의 자연을 그대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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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다지회마을의 갯장어샤부샤부 |
조선 시대 『동의보감』에도 장어는 기력을 회복하는 보양식으로 기록돼 있다. 장흥에서는 여름철 대표 보양 음식으로 갯장어를 찾는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이 적당히 분포된 갯장어는 무더위에 지친 몸에 힘을 채워주는 음식이다.
식사의 끝은 죽이다. 장어의 감칠맛이 배인 육수에 쌀과 미나리, 달걀을 넣고 천천히 끓여낸 죽은 단순한 후식이 아니라 속을 위한 마무리다. 깊은 국물의 여운은 여름이 지나도 오래도록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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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락식당의 장흥삼합 |
육지와 바다가 만난 맛, 장흥삼합
삼합(三合)은 서로 다른 식재료 세 가지를 함께 구워 먹는 조리 방식이다. 전라도에서는 이 방식이 음식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법칙처럼 전해진다. 장흥에서는 한우, 표고버섯, 키조개가 그 삼합을 이룬다. 각각의 재료는 장흥의 지형과 산업을 상징한다. 육지의 청정 초지에서 자란 한우, 깊은 숲에서 나는 표고, 남해의 바다에서 나는 키조개. 장흥삼합은 그 자체로 지역의 자연과 생업이 입안에서 만나는 조합이자, 세 식재료가 따로 또 같이 살아나는 궁극의 맛 조합이다.
장흥삼합은 돌판에 세 재료를 함께 올려 굽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고기에서 배어난 기름을 머금은 표고버섯이 향을 더하고, 키조개는 그 사이에서 단맛을 보탠다. 각 재료가 따로 또 같이 살아나며, 입안에선 숲과 바다가 겹쳐진 풍경이 펼쳐진다.
이 조합은 단순한 미각의 결합이 아니다. 장흥의 농업, 임업, 어업이 만들어낸 식문화의 총합이다. 한우를 기르고, 버섯을 키우고, 조개를 채취하는 이들의 노동이 한 접시에 담긴다. 장흥삼합은 음식이면서도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낸 서사다.
식사의 마지막은 된장찌개로 이어진다. 돌판 위 남은 기름에 제철 나물과 된장을 풀어 끓이면, 삼합의 맛과 향이 국물 속에서 다시 한번 피어난다. 한 끼 식사 그 이상을 증명하는 장흥의 방식이다.
장흥삼합은 단지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이 고장의 자연과 노동, 계절과 공동체가 한순간에 녹아드는 경험이다. 그 찰나의 조화 속에서 장흥은 가장 맛있는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취락식당의 장흥삼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