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쿠데타였다. 민주화가 뿌리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난한 나라에서 주로 벌어지던 일이었다. 쿠데타는 감출 수도 없었다. 탱크가 거리로 나오고 권력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장면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협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유권자의 지지를 등에 업고 독립적이어야 할 법원을 권력의 무기로 삼거나, 언론을 검열하고 폐쇄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스로 갉아먹는 민주주의
미국정치학회장을 맡고 있는 수전 C. 스토크스 시카고대 정치학과 석좌교수는 <백슬라이더>에서 베네수엘라, 튀르키예, 세르비아, 브라질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있는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의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쿠데타가 갑작스러운 폭발처럼 일어나 숨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면 ‘민주주의 침식’은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즉각 알아차리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크스는 민주주의 침식을 ‘수직적·수평적 책임성의 약화’로 규정한다. 수직적 책임성은 유권자가 선거를 통해 권력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이고, 수평적 책임성은 의회, 법원, 독립기관 등 공적 기구가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다. 민주주의가 침식된다는 것은 이 두 축이 동시에 무너진다는 의미다.
유권자가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기 어려워지고, 정부 기관과 독립 기구도 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스토크스는 이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유권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지를 파헤친다.
스토크스는 우선 소득 격차가 ‘퇴행적 지도자’가 부상할 공간을 열어줬다고 본다. 전통 좌파의 정체성이 중산층과 결부되며 희석되는 사이, 저소득층 유권자들은 정치적으로 방치됐다. 이 틈을 파고든 우파 종족민주주의 지도자와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분노와 박탈감을 동원했다.
‘뒤처졌다’고 느끼는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이 특정한 ‘타자’ 탓이라는 주장에 쉽게 끌려갔다. 미국·인도·브라질의 유권자들은 우파 종족민주주의 지도자에게, 베네수엘라·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민들은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에게 마음을 내줬다.
이렇게 권력을 획득한 지도자들에게는 유권자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대중 여론이 결정적이지 않았던 과거의 쿠데타와 다른 점이다. 이들은 지지층을 붙들어두기 위해 반대 진영을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양극화 전략’을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양극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나친 대립은 중도층이나 정치 관여도가 낮은 유권자의 반발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주의 헐뜯기’라는 또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이미 망가져 있으니 핵심 기구를 약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판사들은 부패했고, 선거는 조작됐으며, 기자들은 지도자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민주주의 제도의 공정성, 역량, 정당성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서서히 허문다. ‘부정선거’ 논란으로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진입한 사례가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언어는 무당파 유권자에게 냉소를 낳는다. 냉소는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지도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결집하지 않는 시민이 늘어날수록, 권력을 빼앗길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명백한 거짓을 믿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스토크스는 양극화된 유권자일수록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 선택편향, 당파적 편향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여기에 “정치는 결국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마니교적 구도를 덧씌운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할수록 제도 파괴는 더 쉽게 정당화된다.
전문가 집단의 역할 강조
책은 민주주의 침식을 막을 전략도 제시한다.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죽일 때는 저항의 공간이 곧바로 닫히지만, 선출된 정치인이 권력을 확장하며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때는 대응할 시간이 한동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스토크스는 특히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들의 제재는 퇴행적 지도자의 협력자들에게서 전문가라는 존중받는 외피를 벗겨내고, 반민주적 행태가 정상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직자들은 동료에게 직업 윤리를 지키라고 압박해야 하고, 변호사가 민주주의 침식에 가담한다면 변호사협회가 제재에 나서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선과 악의 구도에서 벗어날 것도 요구한다. 스토크스는 “퇴행적 지도자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당파성이라는 단일한 차원으로 환원해 양극화를 부추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 가족 구성도 다르고, 하는 일도, 응원하는 스포츠팀도 다르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를 극복하는 출발점이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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