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이게 만드는 영화감독 션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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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때때로 사회의 중심부가 아닌 가장자리에서 빛난다. 주류 서사에 포착되지 않는 삶의 조각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곤 한다. 션 베이커(Sean Baker)는 바로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을 조명하며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이다.

‘영화’라는 주류의 언어로, 늘 ‘보이지 않던 삶’을 조명해 온 그는 소외된 이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 안의 희망과 따뜻함을 놓치지 않는다. 가혹한 현실을 다루지만, 시선은 따뜻하고 시각은 감각적이다. 그의 영화들은 마치 창문 같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삶의 풍경을 조금 더 오래,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인간’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주변부 인물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결코 그들을 동정하거나 낙인찍거나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는다. 그저 삶을 살아가려는 또 삶을 살아내는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현실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션 베이커의 이러한 진정성 덕에 그의 영화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정직하게 두드린다.

영화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2006) 촬영 중인 션 베이커 감독. / 사진. ⓒIMDb

영화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2006) 촬영 중인 션 베이커 감독. / 사진. ⓒIMDb

션 베이커의 영화는 언제나 현실의 질감으로 가득하다. 그는 영화 <탠저린(Tangerine)>을 아이폰으로 촬영해 저예산 독립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에서는 디즈니월드 근처의 값싼 모텔에 사는 빈곤층의 삶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영화 <아노라(Anora)>는 사랑과 생존 사이 삶의 민낯을 드러낸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다.

그에게 카메라는 단순한 촬영 도구가 아니라 인물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매개체다. 거리의 소음, 인물들의 즉흥적인 대화, 자연광의 흐름 - 이러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살아 숨 쉰다. ‘다큐처럼 찍되, 영화처럼 느끼게’하는 힘이 있다.

영화 <탠저린>은 아이폰으로 촬영했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탠저린>은 아이폰으로 촬영했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탠저린>에서는 트랜스젠더 성 노동자의 하루를, <플로리아 프로젝트>에서는 모텔에 사는 어린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노라>는 성 노동자인 한 여성이 자유와 사랑을 갈망하며 삶의 경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그는 이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삶을 버텨내는 방식과 인간적인 순간들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서사는 흔히 우리가 ‘주류’라 부르는 영화 세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션 베이커는 그들의 이야기가 결코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임을 일깨운다. 그의 영화들은 인물의 세계에 눈높이를 맞춰, 관객이 사회적 편견을 내려놓고 인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된다.

션 베이커는 삶의 어두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빈곤, 배신,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안에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모텔에 사는 아이들은 비록 가난 속에 살아가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회색빛 일상에 색채를 더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이가 디즈니월드를 향해 뛰어가는 순간은 현실의 무게에 맞서는 순수한 저항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이러한 희망을 ‘행복의 약속’ 같은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영화 속 희망은 지극히 사소하고, 미완의 형태로 남아 있다. 희망과 절망의 미묘한 균형이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촬영 현장.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촬영 현장.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오스카 5관왕에 빛나는 <아노라>는 그의 영화 세계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보여줬다. 션 베이커는 아노라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몽환적인 연출과 강렬한 색감으로 시각화하며, 관객을 인물 의 감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탐구하는 방식이 더욱 성숙해졌음을 보여 준 <아노라>의 연출 방식을 통해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 사랑이 때론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단순히 슬픔이나 절망으로 처리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으로 풀어냈다.

영화 <아노라> 스틸 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아노라> 스틸 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아노라> 촬영 중인 감독 션 베이커. / 사진출처. IMDb

영화 <아노라> 촬영 중인 감독 션 베이커. / 사진출처. IMDb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사회의 가장자리를 조명하지만, 그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얼굴’이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가 외면했던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 안의 슬픔과 기쁨, 욕망과 사랑의 복잡한 결을 세밀하게 그린다. 그의 영화는 늘 사회의 경계에 머무는 인물들을 조명한다.

영화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그리고 그 삶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들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션 베이커 감독의 인물들은 스크린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이게 할 수는 있다.”라는 그의 철학이 영화 속에 살아있기에 우리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더 가까이 보게 되었다.

이언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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