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종구 작가(72·사진)는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세상을 그렸다. 누런 정부미 쌀 포대 위에 농민의 얼굴은 밭고랑처럼 주름이 패여있었다.
그랬던 이종구의 그림이 확 달라졌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8년만에 연 개인전 ‘사유(思惟)’에서 그는 20kg 빠진 자신의 맨몸, 은행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 국보 반가사유상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 제목처럼 보는 이를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하는 그림 38점이 벽에 걸렸다.
‘사유_생로병사2’가 대표적이다. 오른쪽에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휴대폰을 들고 있는 자화상을, 왼쪽에는 병원복을 입고 링거 거치대를 끌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 ‘불이’ 연작에서는 국보 반가사유상과 함께 인간의 벗은 몸, 꽃 등을 나란히 배치했다. 작가는 “부처와 중생,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정치와 사회에 꽂혀 있던 작가의 시선이 자신의 몸과 내면을 향한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코로나19 사태와 건강 악화였다. 수 년 전 위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이후 장폐색으로 대장을 50㎝ 잘라내는 대수술을 한 번 더 받으면서 살이 20kg이나 빠졌다. 작가는 “은퇴 이후 여러 삶의 전환점을 겪으며 존재와 생로병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이르게 됐다”며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내면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면 전쟁이나 싸움도 없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현실을 다룬 작품들도 있다. ‘사유_예토(팔레스타인)’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반가사유상 옆에는 푸른 단색조로 울부짖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그렸다. 하지만 전과 달리 작가는 특정 사건이나 정치 세력을 지목하며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이종구는 “지엽적인 정치적 다툼을 다루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가사유상과 진돗개를 한 화면에 담은 ‘사유_무’, 은행나무 밑에 선 사람들과 개를 그린 ‘나무’ 연작에서 작가의 시선은 모든 생명의 생로병사로 넓어진다. 작가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지를 묻는 불교의 화두를 떠올리며 그렸다”며 “다만 불교라는 종교에 집중한 것은 아니고, 전통 예술과 우리 민족의 성찰을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가사유상 옆 금빛 화면을 그린 ‘불이_사유1’은 한때 민중미술 선봉에 선 투사였던 노(老)화가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작가는 “평생 노동하듯 뭔가를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그려왔는데, 빈 화면을 그리는 게 너무 어려웠다”며 “번뇌와 깨달음도 함부로 분별하지 말고 겸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불이_불’ 등 반가사유상과 함께 불을 다룬 작품들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이제 번뇌를 태우고 지혜를 밝히는 불교적 빛을 화폭에 담고 있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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