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인간도, 프로이센의 왕도, 영국 로커도 사랑에 빠진 그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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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이 부는 악기’. 아름다운 고음 선율 덕분에 생긴 이 별명은 플루트의 편린에 불과하다. 이 관악기의 역사엔 천상의 음성을 그려내려던 인류의 오랜 욕망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인류사와 함께한 플루트가 오늘날 힙합과 록에서 활약하기까지 거쳐온 과정을 되짚어봤다.

슬로베니아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브예 바베 플루트' . 5만여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만든 플루트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출처. 슬로베니아 국립 박물관.

슬로베니아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브예 바베 플루트' . 5만여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만든 플루트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출처. 슬로베니아 국립 박물관.

1995년 슬로베니아에서 음악사에 남을 논쟁적 유물이 발견됐다. 5만여 년 된 곰 넙적다리 뼈였는데, 속은 비어 있고 가운데 구멍 2개가 뚫려 있었다. 마치 피리의 일부 같았다. 슬로베니아 국립 박물관은 이를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동물이 씹어서 구멍이 생긴 뼈에 불과하다는 고고학자들의 반론도 적지 않았다. 이에 맞서 일부 학자는 동물들이 곰 뼈를 씹게 하는 실험까지 벌여 이 구멍이 인간이 만든 것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실은 당시로 돌아가야 알 수 있는 일. 이 유물은 해당 유적지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의 이름을 따 ‘네안데르탈 플루트’로 불린다.

인간의 최초 제작 악기, 플루트

네안데르탈인이 뼈로 관악기를 만든 게 아니더라도 플루트가 인간이 처음으로 제작한 악기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독일에서 발견된 3만5000여 년 전 독수리 날개 뼈를 플루트의 원형으로 본다. 이 뼈엔 손가락으로 막을 수 있는 구멍이 5개 있을 뿐 아니라 입을 대는 취구도 정교하게 깎여 있다. 이 시기는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고 현생 인류가 유럽에 정착하던 때다. 유럽 역사의 태동부터 플루트가 인간과 함께 해왔다는 얘기다.

스페인 화가인 후세페 데 리베라가 1637년 그린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나무에 매달린 채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게 된 마르시아스의 머리맡에 피리가 떨어져 있다.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화가인 후세페 데 리베라가 1637년 그린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나무에 매달린 채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게 된 마르시아스의 머리맡에 피리가 떨어져 있다.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플루트의 흔적이 보인다. 아테나가 사슴의 뼈로 겹관 피리를 만든 뒤 연주를 즐기는 장면이 그 예다. 연주 도중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보고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비웃자 아테나는 악기를 내던지며 “이걸 줍는 자에겐 끔찍한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피리를 주운 사람은 반인반수이자 숲의 신령(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였다. 그는 피리 소리에 홀려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대결을 청했다가 패해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는다.

플루트는 본래 리드(reed)가 없는 관악기를 총칭한다. 리드는 악기 주둥이에 끼워 소리에 떨림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가장 오래된 리드 관악기는 기원전 2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엔 취구에 입김을 넣어 내부 공기를 진동시키는 방식으로 소리를 냈는데, 이 단순한 방식이 곧 플루트의 정체성이 됐다. 음의 높낮이는 관에 뚫린 구멍들을 손가락으로 막아 소리가 나가는 길을 조정하는 식으로 바꿨다. 소재는 자연에서 구하기 쉬운 목재를 주로 사용했다.

금관 플루트, 19세기에 등장

플루트가 목관악기로 분류되는 이유는 소재가 아니라 소리를 내는 방식 때문이다. 입술을 직접 떨어 소리를 내면 금관, 바람을 불어 넣거나 리드를 써서 음을 내면 목관으로 나뉜다. 바로크 시대 플루트는 세로로 부는 피리인 ‘리코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처럼 가로로 부는 플루트를 지칭하려면 이탈리아어 ‘플라우토 트라베르소(flauto traverso)’나 독일어 ‘크베어플뢰테(querflöte)’란 이름을 써야 했다. 이 시기 플루트는 음역대가 좁은 데다 큰 소리를 내기도 힘들었다.

네덜란드 화가인 코르넬리스 트루스트가 1736년 그린 제로니무스 톤네만과 그의 아들 제로니무스의 초상화. 바로크 시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펍히스트.

네덜란드 화가인 코르넬리스 트루스트가 1736년 그린 제로니무스 톤네만과 그의 아들 제로니무스의 초상화. 바로크 시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펍히스트.

고전주의 시대엔 플루트가 개량되면서 소리가 더 명확해진다. 반면 리코더는 음량을 키우려 숨을 세게 불어넣었다간 음정이 확 올라가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오케스트라 같은 대규모 악단이 등장하자 플루트는 아기자기한 소리를 내던 리코더의 자리를 대체한다. 하이든은 교향곡마다 플루트를 넣었다. 반면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견딜 수 없는 악기(플루트)를 위해 곡을 써야 할 때면 금세 의욕을 잃고 만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남긴 플루트 협주곡 두 곡이 명작으로 불리는 건 아이러니다.

현대 플루트의 기틀은 19세기 중반 독일 악기 제작자 테오발트 뵘이 완성했다. 그가 만든 금속 플루트는 목재보다 맑고 청아한 고음을 냈다. 손가락 대신 지레와 축의 원리를 이용한 키 시스템으로 구멍을 막도록 해 음정의 안정성도 높아졌고, 연주도 훨씬 쉬워졌다. 20세기에도 소리 구멍의 크기나 위치가 바뀌는 등 세부적인 조정이 있었지만, 현대 플루트는 여전히 뵘의 설계를 따른다.

사람 키보다 큰 플루트, 세워서 연주해야

플루트는 음역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일반적인 플루트는 콘서트 플루트다. 플루트 형제 중 가장 높은 음을 내는 건 피콜로 플루트다. 길이는 콘서트 플루트의 절반이지만 소리의 존재감은 최고. 8옥타브 도에 달하는 초고음역 소리는 대규모 관현악단의 총주도 뚫고 나올 정도다. 알토 플루트는 콘서트 플루트보다 소리가 4도 낮다. 관도 조금 더 길고 두껍다. 종류에 따라선 취구가 있는 헤드 부분이 U자 모양으로 말려 있기도 하다.

독일 화가 아돌프 멘첼이 1852년 그린 ‘상수시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독일 베를린 알테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독일 화가 아돌프 멘첼이 1852년 그린 ‘상수시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독일 베를린 알테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베이스 플루트는 콘서트 플루트보다 한 옥타브 더 낮은 소리를 낸다. 길이가 콘서트 플루트의 2배여서 취구가 U자로 말려 있다. 콘서트 플루트보다 두 옥타브가 낮은 콘트라베이스 플루트도 있다. 길이가 2.7m나 돼 가로로 들어 연주할 수가 없는 악기다. 거대함 때문에 이 플루트는 헤드 부분이 숫자 ‘4’ 모양으로 말려 있을 뿐 아니라 세로로 세워서 연주할 수밖에 없다. 크기 덕분에 파이프오르간처럼 웅장한 울림이 나는 게 매력이다. 이들 플루트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저음은 더욱 깊고 묵직해진다.

여러 플루트가 모이는 곡도 있다. 라벨이 쓴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은 피콜로, 콘서트 플루트, 알토 플루트 등으로 화려하게 노래하는 그리스 신화를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라벨이 “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고 말한 곡이다. 포레 ‘파반느’를 플루트 앙상블로 편곡한 버전에선 알토·베이스 플루트가 첼로처럼 깊고 따뜻한 저음을 쌓는다.

지난해 타계한 프랑스 작곡가이자 파리 오페라 극장 수석 플루티스트였던 레이몽 귀오는 아예 플루트 앙상블만을 위한 곡 ‘다이버티멘토’를 쓰기도 했다. 타악기처럼 두들기듯 울리는 저음역 플루트와 벌새처럼 재빠르게 선율을 흔들어대는 피콜로가 어우러져 플루트의 가능성을 한껏 실험하는 작품이다.

팝 스타 리조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이 선물 받았던 유리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팝 스타 리조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이 선물 받았던 유리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록도, 랩도 플루트와 함께

역사가 길다 보니 플루트를 아낀 인물도 많았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대표적 ‘플루트 덕후’다. 그는 영토를 넓힌 정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자 칸트를 열렬히 후원했을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의 헌정’에 쓰인 주제 선율을 제공하고 직접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한 교양인이었다. 수필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글을 쓰진 않을 땐 호숫가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미국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프랑스 장인이 만든 유리 플루트를 재임 기념 선물로 받았다. 미 의회도서관에서 소장된 이 악기를 2022년 팝스타 리조가 직접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플루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허비 맨이나 허버트 로스 등의 음악가들은 플루트를 재즈 선율을 담당하는 주연 악기로 만들었다. 록에선 영국 록 밴드 제트로 툴의 리더인 이언 앤더슨이 전설적 장면을 만들었다. 한 발로 선 학(鶴) 같은 자세로 거친 인성(人聲)을 섞어가며 플루트를 휘몰아 불던 그의 모습은 록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힙합에서도 플루트는 한 획을 그었다. 5월 18일 기준 유튜브 공식 영상 조회 수가 6억6400만 회에 달하는 힙합 아티스트 퓨처의 2017년 곡 ‘마스크 오프’가 그것이다. 이 곡에선 플루트 선율이 랩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당시 SNS에선 저마다 이 선율을 플루트로 연주한 영상을 올리는 ‘플루트 챌린지’가 유행처럼 번졌다.

록 밴드 제트로 툴의 리더인 이언 앤더슨이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출처. 제트로 툴 페이스북 페이지.

록 밴드 제트로 툴의 리더인 이언 앤더슨이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출처. 제트로 툴 페이스북 페이지.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더 쉽게, 깊이 있는 기사를 쓰겠습니다. 국제부 이주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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