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 그려낸 밑바닥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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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우리에게 막심 고리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였고, 장편 <어머니>는 소련을 대표하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제정러시아 시기 노동절에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아들로 인해 각성한 어머니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투신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기억에서 ‘소련’을 급하게 지워버리면서 <어머니>의 대표성도 휘발되었다. 러시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음에도 희곡 <밑바닥에서>만큼은 슈콜라 11학년 필독서로 여전히 읽힌다. 연극 <밑바닥에서>는 1902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틴 역은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맡았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00년 이상 명성을 유지했다. <밑바닥에서>는 사회 철학적 드라마로 세기말, 저마다 인생의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머무는 여인숙이 배경이다. 위안이 되는 거짓말의 정당성,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와 능력 등이 쟁점으로 등장한다.

연극 <밑바닥에서> 1막의 장면(1902).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연극 <밑바닥에서> 1막의 장면(1902).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밑바닥의 군상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장 저렴한 주거 형태인 여인숙에서 공존하도록 내몰려 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비극과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폐쇄된 공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일한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함께 사는 삶은 폭력과 알코올 중독으로 특징지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어두운 지하실에 머물며 사회 구조와 기독교 신앙, 인본주의와 같은 주제에 대해 주기적으로 다른 의견을 표현한다.

미하일 코스틸료프는 54세의 부유하고 탐욕스러운 하숙집 주인으로, 손님들로부터 모든 것을 쥐어 짜낼 준비가 되어 있다. 바실리사는 그의 아내다. 남편보다 28세 연하로 돈에 욕심이 많다. 계산적인 이유로 남편과 결혼했으나 더 이상 계산적인 이유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종종 바시카 페펠의 허름한 집에 연인으로 찾아가 폭군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날 구원을 희망한다. 나타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20세 미혼 여성으로 바실리사의 동생이다. 바시카는 28세의 도둑으로, 나타샤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것은 그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지닌 바실리사의 질투를 유발한다.

바시카 페펠 역을 맡은 표트르 박셰예프, 보리스 그리고리예프, 1923. / 필자제공

바시카 페펠 역을 맡은 표트르 박셰예프, 보리스 그리고리예프, 1923. / 필자제공

안드레이 클레시는 40세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을 통해 성공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안나는 클레시의 30세 아내로 친절하고 참을성 있고 침착한 영혼을 지녔으나 가난한 생활의 고난으로 인해 상처받은 여성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고자 신께 시선을 두지만, 곧 허름한 집에서 죽는다. 부브노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는 45세의 노름꾼이다. 한때 모자를 만드는 사업체를 운영했지만 파산했다. 나스챠는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사랑을 찾고 구원을 꿈꾸는 24세의 여성이다. 남작은 33세의 영락한 귀족이자 나스챠의 동거인이다.

사틴은 40대로, 한때 전신국에서 일하며 책을 많이 읽었다. “성질과 짜증으로 악당을 죽였고” 여동생의 명예를 지켰다. 출옥 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기꾼이 되었다. 배우는 자기 이름조차 잃어버린 전직 연기자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크바시냐는 40대 여성으로 만두 장수다. 정직한 일로 생계를 꾸린다. 옛날 옛적 그녀에게는 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이 있었기에 이제는 자유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아브람 메드베데프는 바실리사와 나타샤의 삼촌인 50세의 경찰관으로 “사람은 조용히 행동해야 한다”라고 확신한다. 그는 만두 장수 크바시냐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는 그의 감정에 보답하지 않는다. 알료시카는 20세의 제화공으로 술을 좋아한다. 이들 사이에서 다툼이 끊임없이 불타오른다.

홀연히 등장해 이들의 인생에 강하게 개입하는 인물인 루카는 60세의 방랑자로, 인생 경험이 많다. 그는 여인숙에 나타나 손님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배우에게는 알코올 중독자가 무료로 치료받는 클리닉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시카에게는 나타샤와 함께 시베리아로 가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죽어가는 안나에게는 평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괜찮아! 죽음이 가까운 게야, <...> 죽으면 편안해져…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어! 고요하고 편안하고… 누워요! 죽음은… 모든 것을 진정시켜 주고… 우리를 다정하게 안아주지… 죽으면 쉴 수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야! 왜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인간이 쉴 곳은 없기 때문이지!”

연극 <밑바닥에서>에서 루카와 남작(1902). / 필자제공

연극 <밑바닥에서>에서 루카와 남작(1902). / 필자제공

저 세상과 저 너머

본명 알렉세이 페시코프인 작가가 '고리키', 즉 '쓰라리다'라는 가명을 선택한 데는 그의 가혹한 어린 시절 영향이 크다. 조실부모하고 조부모 밑에서 컸는데 가난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고 온갖 잡일을 전전했으며 러시아 곳곳을 방랑했다. 그의 공부는 모두 독학으로 채워졌으나 과학, 철학, 문학 등 많은 책을 읽었고, 지방 신문의 기자-편집자가 되었다가 집필 경험을 쌓았으며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산 문학계 인물들에 추천되었다. 1884년, 고리키는 마르크스를 읽었고, (러시아 생활의 혐오스러운 것, 힘들고 참을 수 없는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단계별로 제시한 빛으로 이해했다, 20세기 초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종교를 대체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혁명 단체 및 선전가와의 연관성 때문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06년 러시아를 떠나 미국, 이탈리아로 망명했다가 1928년에야 스탈린의 개인적인 초청으로 돌아온 고리키는 소련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작가이다. 그는 1936년 6월 18일에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막심 고리키(1868-1936).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페시코프다. '고리키'란 가명은 '쓰라리다'는 뜻을 지녔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막심 고리키(1868-1936).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페시코프다. '고리키'란 가명은 '쓰라리다'는 뜻을 지녔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고리키의 다른 텍스트인 <거짓말하는 검은 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라는 짧은 비유는 <밑바닥에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우화로 1893년 작인데, 주인공은 두 마리의 새다. 검은 방울새는 편안하고 침착하게 앉아서 먹이를 쪼아먹던 새들에게 날아가라고 말한다. “저는 자연의 창조물 속에서 우리 조류의 사명이 최종적인 것이며, 매우 복잡하고 지혜로운 행동을 요하는 것이라는 불굴의 신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 미래는 자연이 맹목적인 힘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눈으로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켜줘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저도 분명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우리가 그 길에서 치러야 할 노고에 보답해줄 훌륭한 나라가 꼭 있습니다! 그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 있고 아직 우리가 모르는 기적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연설을 듣고 있던 딱따구리의 반격이 이어진다. “지금 여러분은 헛되이 기만당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들으신 노래와 말은 뻔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 검은 방울새에게 그가 한 말을 사실로써 증명할 수 있는지 물어봅시다. <...>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려니 마음이 아프지만, 여러분 중 누구도 저보다 높이 날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논쟁에서 딱따구리가 이긴다, 결과적으로, 이 새들은 아무 데도 날지 않는다.

1902년 예술극장 배우들 앞에서 희곡 <밑바닥에서>를 낭독하는 고리키, 알렉세이 키릴로프, 1949. / 필자제공

1902년 예술극장 배우들 앞에서 희곡 <밑바닥에서>를 낭독하는 고리키, 알렉세이 키릴로프, 1949. / 필자제공

이 동화는 여러 면에서 나중에 연극 <밑바닥에서>에서 펼쳐질 갈등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밑바닥에서>의 모든 캐릭터가 이 울타리 위의 새들인 셈이다. 루카가 나타나 모두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사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다음 사라진다. 이 ‘바닥’에 남아 있는 각 캐릭터 대부분의 운명은 불행하다. 즉, 연극의 다른 인물들이 말하듯이, ”그의 달콤한 거짓말”은 결과적으로 어떤 좋은 결과도 낳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바로 그러한 대화를 나눈다.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인가, 어딘가로 떠날 것인가?” 루카가 배우에게, 이 ‘밑바닥’을 떠나 알코올 중독자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을 상기해 보자. 세습 도둑인 페펠은 루카의 말대로 자신과 사랑에 빠진 나타샤와 함께 ‘바닥’을 떠나 시베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새로운 장소로 가서 새로운 삶을 찾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명령받은 대로, 어쩌다 살게 된 대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희망은 ‘이 세상 어딘가’와 ‘저 세상’에만 있다고 알려지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사흘만 정직하게 살면 굶어 죽는” 이들과 “장화 대신 발에 신을 수도 없는” 명예나 양심이 자리를 차지하기 힘든 현실이다.

자유로운 인간과 진실의 땅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농민들은 도시로 갔다. 그들은 집을 살 형편이 못 되어 구석을 빌리거나 심지어 길 위를 떠돌았다. 20세기 초 이런 여인숙의 수가 증가했다. 고리키는 이러한 거주 형태에 사는 사람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젊었을 때 자신의 상황이기도 했으므로 그 묘사가 가능했다. “토굴과 같은 지하실. 육중한 아치형 돌 천장. 회반죽 칠은 벗겨져 떨어지고, 그을려 검게 된 검댕 천장이다.” 집필 의도를 고리키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무대 위의 태양, 쾌활한 태양, 일종의 러시아인 - 아주 밝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태양을 보고 싶다.” 같은 방식으로, 루카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잠깐 ‘조명’한 후 사라진다. 루카 세계관의 거짓됨을 증명하기 위해 고리키는 루카를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깊은 희망을 걸고 있는 순간에 “무책임하게” 사라지게 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사틴의 입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 이성에 대한 믿음, 창조적 힘을 선포한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투쟁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달콤한 거짓말”에 대한 비난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주된 비난의 화살은 루카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가혹한 현실에 대항할 힘을 찾지 못하는 인물들에게로 향한다.

사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거요?
루카: 그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고 있는 거지!

바시카는 도둑, 나스챠는 매춘부, 남작은 포주, 사틴은 노름꾼이다. 이 비인간적인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실이지만, 분명 유일한 세계는 아니다. 사틴이 말하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인 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남을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는 자”, 그래서 “노예나 주인의 종교”인 “거짓말이 무용지물”인 자, 진실을 신으로 삼는 ‘자유로운 인간’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공의와 진실의 땅이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로운 인간은 도래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 열망은 “모든 게 인간 속에 있고, 모든 게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 간! 인간은 위대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가!”라는 부르짖음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루카가 말한 ‘안식과 소망의 땅’은 지도에도 우주 어디에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자유와 진실과 공의와 안식의 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프랑스 감독 장 르느와르의 영화 '밑바닥'(1936). / 필자제공

프랑스 감독 장 르느와르의 영화 '밑바닥'(1936). / 필자제공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밑바닥'(1957). / 필자제공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밑바닥'(1957). / 필자제공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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