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능케 하는 환상[내가 만난 명문장/강보원]

8 hours ago 5

“난 벌써 떠났는걸.”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중

강보원 시인

강보원 시인
존 그래디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말을 사랑하고 목장 일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는 열여섯 살 소년이다. 그는 어머니 소유의 목장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자 목장에서 일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 롤린스와 함께 멕시코로 떠난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이 자란 마을을 떠나는 존에게서 우리는 자유가 어떻게 필연의 모습으로 외양하는지를 본다. 그가 받아들인 자신의 운명 속에서 그의 떠남은 어떤 선택조차 아니다. 그 운명 속에서 존은 이미 떠나 있다. 만약 내가 이미 떠나 있다면,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존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삶과 삶의 의미가 일치할 수 있는 터전이다. 이 터전에서 노동은 하나의 소명이 된다. 말이나 소를 돌보며 사는 것은 매일매일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은 바로 그 일을 사랑한다. 즉, 소명은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두 가지, 돈과 의미를 모두 제공해 준다. 말하자면 살아간다는 것과 일한다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 상태다.

어쩌면 터전에 대한 열망도,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자유도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근대화가 끝난 미국의 1940년대에 존이 꿈꾸던 카우보이의 낭만적 삶을 위한 공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에서 존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떠났던 마을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환상은 삶과 무관한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다. 집이나 나무나 음식처럼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실재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도무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환상일 수도 있다. 비극적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존의 모습이 내게 여전히 어떤 울림을 주는 이유다.

강보원 시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