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의 목적은 내리막이 아니다. 내려와서 마실 ‘한 잔’이다.”
알프스의 스키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았다고 한다. 얼핏 유머처럼 들리지만, 이 문장은 스키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뒤집는다. 만약 스키의 목적이 오직 속도라면 그 끝은 더 가파른 경사뿐일 테니까.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슬로프를 하강하는 짜릿함이 지나간 뒤, 스키 플레이트를 벗어 던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여정에 이들은 주목한다. 바로 ‘아프레 스키(après-ski)’의 시간이다.
프랑스어로 ‘스키를 탄 뒤’(after ski)를 뜻하는 이 짧은 단어는 스키를 스포츠가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그것은 스키를 탄 뒤 몸의 찬 기운을 녹이는 따뜻한 술 한 잔이자, 커다란 스키 부츠를 신은 채 즐기는 춤사위이고, 모닥불 앞에서 낯선 이와 나누는 다정한 농담이다. 어쩌면 자연과의 사투가 끝난 뒤 여유를 회복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에 가깝다.
최근 몇 년 새 아프레 스키 문화가 서구권에서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분명하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이어서다. 국내 스키장들이 여전히 슬로프 위 시간에 집중하는 사이, 해외 유명 스키 플레이스들은 슬로프 밖의 공간을 확장해왔다. 하강 동선 곳곳엔 테라스와 바, 선베드, 음악과 벽난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스키 부츠를 신은 채 미끄러져 들어서는 숙소는 그저 낙원이다.
설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바에서 스키어들은 기록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날의 햇볕과 지금 마시는 샴페인의 온도가 자연스러운 대화의 주제가 된다. 경쟁의 언어가 사라지고 관계의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스키는 비로소 완성된다.
글로벌 패션계 역시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샤넬과 구찌 등 명품 브랜드들은 퍼 코트와 방한 부츠 등을 앞세운 아프레 스키 컬렉션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제안하는 스키웨어는 단순히 추위를 막기 위한 옷이 아니다. 스키를 탄 뒤 바에 앉았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 운동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태도가 핵심이다. 설원의 낭만을 일상으로 옮겨온 패션은 여유로운 삶의 태도와 사회적 지위를 증명한다.
다시 스키어의 계절이다. 이번 겨울의 여정은 슬로프의 길이보다 ‘스키 이후의 시간’에 조금 더 집중해봐도 좋겠다. 속도는 기계도 낼 수 있지만, 여유는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급’ 특권이니까.
사교 클럽 된 낭만의 雪原…"슬로프 얘기는 그만, 한 잔 하자"
아프레 스키의 문화 코드
19세기 노르웨이 겨울, 스키는 스포츠가 아니라 처절한 생존 도구였다. 깊은 설원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가족의 끼니를 책임질 사냥감을 쫓기 위해 사람들은 나무판자를 발에 묶었다. 눈길을 무사히 건너온 이웃을 맞이하며 나누던 독주 한 잔은 쾌락이 아니라 안도의 의식이었다. 지금도 쓰이는 북유럽의 건배사 ‘스콜’(Skål·건배)은 오늘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증명이었던 셈이다. 인간의 절박한 생존 노력에 뿌리를 둔 아프레 스키(après-ski)는 어떻게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을까.
살롱이 된 은빛 설원
스키장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1950년대 프랑스 알프스다. 전후 유럽은 ‘살아남는 기술’ 대신 ‘잘 사는 기술’을 배우던 시기였다. 생모리츠, 메제브, 쿠르슈벨 등 지금도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스키 플레이스들은 유럽 상류층의 새로운 사교 무대로 급부상했다. 낮에는 설원을 가르고, 해가 기울면 스키 부츠를 벗어던진 채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는 공간.
이 전환의 찰나를 가장 우아하게 기록한 이는 사진작가 슬림 에런스다. 그는 “나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찍지 않는다.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다”고 말했다. 1960년대 그가 찍은 ‘윈터 홀리데이’ 시리즈에는 땀에 젖은 얼굴, 슬로프 위의 역동적 움직임 같은 운동 궤적이 없다. 그 대신 인물들은 눈부신 설원 위 테라스에 앉아 술잔을 들고 나른한 햇볕을 즐긴다. 스포츠로서 스키는 철저히 사진 밖에서만 존재한다. 아프레 스키는 그렇게 운동의 연장선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장치로 재정의됐다.
사교의 장으로 진화한 무대에도 암묵적인 규칙은 있었다. 바로 “슬로프 얘기만 하는 지루한 사람이 되지 말라”(Don’t be a piste bore)는 것이다. 어느 코스가 더 험난했는지, 누가 더 빠르게 내려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프스의 유서 깊은 스키 클럽과 사교 모임의 멤버십 가이드는 대화 주제로 날씨, 설질(雪質), 음식, 와인을 권한다. 기록 경쟁은 슬로프 위에서 끝날 뿐, 내려온 뒤의 목적은 오직 ‘관계’다. 성과 중심의 언어를 휴식 시간에서 밀어내는 느슨한 합의가 아프레 스키를 단순한 운동 후 ‘뒤풀이’와 구분 짓는다.
설원 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점도 스키어를 아프레 스키 플레이스로 이끈다. 슬로프에서는 실력이 위계를 나누지만 테라스에서는 대화가 사람을 연결한다. 사회적 직함은 두툼한 겉옷 아래 숨겨지고, 모두가 얼굴에 고글 자국을 훈장처럼 단 채 시간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1980년대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오스트리아 레흐의 스키 펍에서 현지인과 스스럼없이 맥주를 마셨다. 계급 없는 익명성이라는 아프레 스키의 미학이 상징적으로 담긴 역사적 장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나눔과 속도 조절의 미학
아프레 스키의 대표 음식으로 꼽히는 퐁뒤에도 나눔과 속도 조절의 미덕이 깃들어 있다. 치즈를 녹인 냄비 하나를 가운데 두고 여럿이 빵을 찍어 먹는 퐁뒤는 빨리 먹고 치우는 식사가 아니다. 치즈가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대화는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벽난로를 등지고, 퐁뒤에 따뜻한 뱅쇼를 곁들이는 느린 식탁에서 추위와 긴장감은 서서히 풀린다. 스키어들은 눈과 불 사이를 오가며 활강과 휴식 사이를 연착륙한다.
아프레 스키는 멈춤의 미학이다. 어떤 스포츠를 하든 ‘더 빨리, 더 많이’라는 기록에 유독 집착해온 한국인에게는 아직 낯선 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슬로프 이후의 설원은 묻는다. 스키 고글과 플레이트를 벗어던진 뒤의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스키 다음의 이야기가 이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는 결국 설원보다 일상에 더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활강 후 들이켰다…차가운 몸 덥힐 뜨거운 유혹
달콤살벌한 毒酒의 맛
은빛 슬로프를 내려와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 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뜨거운 술잔을 손에 쥐는 일이다. 묵직한 스키 플레이트를 벗어던지고 활강 속도를 내려놓는 순간 해방감마저 몰려온다.
스키를 타고 나서 마시는 술은 대체로 도수가 강하거나 향이 매우 진하고 혹은 뜨겁다. 북유럽에서 마시는 아쿠아빗(Aquavit)이 대표적이다. 감자나 곡물을 증류한 뒤 캐러웨이와 딜 같은 허브로 향을 더한 술로, 도수가 40% 안팎에 달한다. 이름부터 ‘생명의 물’이라는 뜻인 이 술은 스키가 생존 도구이던 시절 무사히 돌아왔음을 자축하는 일종의 ‘생존 기념주’였다. 한약처럼 진한 맛이 처음엔 낯설 수 있지만 한 모금 넘기면 금세 몸이 기분 좋게 데워진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알프스 지역 스키장에서는 글뤼바인(Glühwein)이 빠지지 않는다. 레드와인에 계피와 정향, 오렌지 껍질을 넣어 따뜻하게 마시는 이 술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머그잔에 담아 마신다. 과일 증류주인 슈냅스, 우리나라에서는 ‘파티 술’로 잘 알려진 허브 리큐르인 예거마이스터 등 독주도 스키어에게 인기 있는 술이다.
이탈리아에선 조금 더 달콤한 봄바르디노(Bombardino)로 긴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우유, 달걀 등으로 만든 에그노그에 브랜디를 섞고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외형은 술과 디저트의 중간쯤에 있다. 한 모금 들이켜면 입안에서 달달함이 기분 좋게 퍼지는 이 술을 한 이탈리아 작가는 “활력을 주는 작은 방종(放縱)”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따뜻하게 마시는 핫 토디(Hot toddy·사진)도 인기 메뉴다. 위스키, 럼 같은 증류주에 끓는 물과 꿀 또는 설탕 등을 섞은 음료로, 언 몸을 녹이고 긴장을 풀어준다.
정소람/안혜원 기자 ram@hankyung.com

5 hours ago
2
!["4시간 기다려서 먹었어요"…박명수도 반한 '쫀득' 강릉 간식 [트렌드+]](https://img.hankyung.com/photo/202601/01.43047436.1.png)
![여성이 보낸 메시지, AI로 '우울증' 진단했더니…깜짝 결과 [건강!톡]](https://img.hankyung.com/photo/202601/99.43018626.1.jpg)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