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교보문고 2025년 4월 1주차 집계), 오빠가 돌아왔다.’ 소설가 김영하가 신작 <단 한 번의 삶>으로 우리 곁에 귀환했다. 실패와 모험의 여행기로 60만 독자를 매료시켰던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의 산문집이다. 지난해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연재된 글을 다듬어 묶은 책이다. 매주 화요일 오전 8시, 구독자가 받아본 ‘영하의 날씨’ 레터에는 김영하의 ‘인생 사용법’을 주제로 한 책·음악·산문을 비롯해 전시·영화 추천, 구독자와의 질의응답 등에 관한 글이 실렸다.
한 구독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훈계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인생 소개서 같은 느낌"이라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유학 생활 에피소드부터 영감을 준 어떤 사람의 말 등 다양한 주제로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낸 책이다. 작가는 일회용처럼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이기에, 나는 선택과 운명이 회오리치는 유일무이한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이기에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삶의 깨달음을 논하거나 자신만의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군인으로서 애환 깊은 삶을 살아온 부모님을 회고하는 등 직접 겪거나 기억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담담한 어조로 전달한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출간 소회를 밝히며 “이제 이 책은 세상의 것”이라고 했다. 팬 사인회 후기 글에서는 “어떤 분들이 제 책을 읽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고 말했다. 작가가 책을 통해 독자의 인생을 듣는 청자가 되고, 독자는 자기 인생을 술회하는 화자가 되는 셈.
작가의 메시지는 텅 빈, 마치 도화지 같은 이 책에, 지금 독자의 목소리가 모이고 독자의 삶들이 울려 퍼지고 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속을 한 번쯤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잔잔한 산문’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어떤 작가이기에 사유의 조각들만으로도 독자의 열렬한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일까
파괴적 일탈에서 관조적 성찰로
“나는 그 남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욕조에서 칼로 동맥을 긋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이유? 아무것도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지만 아냐. 어쩌면 그날의 퍼포먼스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김영하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자살 안내자의 등장, 탐미적 죽음의 충동’ 1990년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기성 문단을 뒤흔들어 놓은 신세대 소설가 김영하. 당시로선 도발적 주제인 데다 장편 분량인 소설을 단 보름간의 칩거로 해치웠으니 과연 ‘악마적 창조성’을 지녔다는 평을 들을 만했다. 동시대 단편 <나는 아름답다>에서도 여인의 자살을 담아내는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르시시즘적 죽음의 미학’을 읊조리던 그의 시선은 2000년대 이후 점차 방외인 그리고 약자를 향한다.
대한제국 시기 멕시코 이주민의 비극적 삶을 다룬 <검은 꽃>, 고아 출신 폭주족 우두머리의 행적을 그린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살인마의 기억 추적기 <살인자의 기억법> 등에서는 추리적 재미를 넘어 위로의 징조가 느껴진다. 그간 ‘파괴적 일탈’에 도전함으로써 세기말로 치닫던 이 시대의 욕망과 허위의식을 타파해오던 그가 조금씩 ‘관조적 성찰’의 영역으로 세계를 확장해나간 것이다. 이처럼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특출난 재능으로 그는 문학동네 작가상을 시작으로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휩쓸었다.
특히 근래 들어 다양한 산문집을 내고 국내외 무대에서 강연자로 활동하면서 김영하 사유의 지평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철학과 자기다움의 문제의식으로 깊어지고 있다.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감각적 글쓰기다. 단문 위주의 간결한 문체, 기이한 상상력과 속도감 있는 서사는 소설과 산문을 넘나들며 독자들에게 흡입력 있게 다가간다. 50대 중반에도 여전한 ‘젊은 감각의 작가’. 김영하를 독자 곁에 존재시키는 동력은 오랜 기간 여행으로 다져진 그만의 통찰력이다. 그를 ‘도시적 감수성’의 작가이자 ‘시대의 여행자’로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감수성의 얼리어답터, 영원한 ‘신세대 작가’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여행의 이유>에서) 2008년 서울 아파트를 팔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사직한 뒤 이탈리아 시칠리아와 캐나다 밴쿠버, 미국 뉴욕에서 3년, 부산 해운대에서 다시 3년. 현재 연희동에 정착하기까지 그의 방랑벽과도 같은 여행은 한동안 계속됐다. 유년시절 전학만 6번을 다닌 그는 <여행의 이유>에서 비자 문제로 중국 입국이 무산된 해프닝 등을 소개하며 ‘실패한 여행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맨살에 조끼, 귀걸이 차림의 경영학과 출신 ‘신세대 소설가’는 긴 여행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고 돌아와 어느덧 문단의 중견이 됐다. 이제는 의외로 시끄러운(?)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정원 가꾸기와 쿠키 굽기를 즐기는 ‘어른 산책자’로서 독자와 호흡하고 있다. 한국식 음주문화와 집단주의를 배격하고 내면의 신념, 자기다움을 길러나가온 그는 현실적이면서도 와닿는 조언들을 남겼다.
“저는 절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의 100%를 다하지 않아요. 쓸 수 있는 능력의 60~70%만 씁니다. 인생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큰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내 능력이나 체력을 남겨둡니다.”(tvN ‘알쓸신잡3’에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어요. 그런 사람들은 거의 뭘 잘못하지 않아요. 인간관계를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 힘이 약해서 당하는 일이에요.”(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김영하가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한 신세대 작가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문체의 차원을 넘어 그가 ‘감수성의 얼리어답터’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PC통신으로 글을 썼고 그 시절 최신 통신기기였던 삐삐를 문학적 소재로 도입했으며, 2000년대 이후에도 미니홈피 운영에 팟캐스트 활동, 예능 출연과 현장 강연에 이르기까지 그는 종횡무진했다. 동시대의 감수성을 발 빠르게 간파하고 인기 있는 첨단 매체를 통해 독자의 기호에 맞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공감의 마당을 넓혀나간 것이다. 그의 소설과 산문이 특유의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하게 된 까닭은 결국 자유분방한 문학적 상상력에 여행으로 깊어진 통찰과 사유, 그리고 시대를 읽는 감수성의 예민한 발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삶, 어떻게 살 것인가
김영하는 이번 <단 한 번의 삶> 출간 기념으로 문장과 그림이 있는 전시회를 인사동에서 열기도 했다. 작가의 글→편집자 전달→화가의 작품으로 완성돼 이메일로 글과 함께 발송해 온 디지털 그림을 아크릴 작품으로 전시한 것이다. 티켓은 도서 사전 예약 고객에게 증정됐다. 작가는 전시회 목적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제 독서는 가만히 앉아 인쇄된 글자를 읽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독자 개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과정으로 변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원래 이 책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발과 몸, 손으로 다시 읽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전시회를 보며 ‘원초적 감각’으로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색다르게 느꼈을 독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정립됐을까. 매번 실험적이지만 더는 파괴적이지 않고, 어른 작가이지만 꼰대 같지 않은 김영하와의 ‘문학적 대화’ 속에서 우리는 따뜻함을 느낀다. 이제 출세작을 조금 고쳐 써본다. “나는 나를 사랑할 권리가 있다.”
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