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제발 그만 하세요….”
화내는 사람, 우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자식들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지난날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스스로 하나하나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캔버스를 차례차례 불길에 던져넣으며 아버지는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내 세상이 무너졌어.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가 자포자기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다 버리는 그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호주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 존 피터 러셀(1858~1930)은 자신이 수십 년간 그려온 그림 400여점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의 친구였고, 앙리 마티스의 스승이었으며,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당신은 언젠가 모네와 르누아르, 반 고흐처럼 위대한 화가로 취급될 것”이라고 말했던 화가 러셀의 그림 대부분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러셀의 삶, 그리고 끝내 그가 버리지 못했던 그림들의 이야기.
금수저 화가
“돈 걱정 없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상 수없이 많은 화가들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러셀입니다. 그는 먹고살 걱정 없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행운아, 말하자면 금수저였습니다.
러셀은 1858년 호주 시드니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러셀의 아버지는 호주에서 가장 큰 엔지니어링 회사의 경영자. 어머니는 조각가의 딸이었습니다. 엔지니어와 예술가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공학, 예술에 모두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운명이 결정된 건 스물한 살 때였습니다.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영국에서 공학도의 길을 걷던 중,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게 계기였지요. 젊디젊은 나이에 뭐든지 할 수 있는 돈이 생긴 러셀은 그동안 마음속 깊이 감춰뒀던 예술가의 꿈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러셀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유명 화가 코르몽이 운영하던 화실 ‘아틀리에 코르몽’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입학 첫날, 반짝이는 눈을 가진 키 작은 남자 한 명이 러셀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습니다. “내 다리는 짧을지 몰라도,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루셀(프랑스인들은 그의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다)이라고 했나? 잘 부탁해.” 붙임성 좋은 이 남자의 이름은 툴루즈 로트레크. 이날을 시작으로, 러셀은 훗날 거장이 될 수많은 화가들과 친구가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고흐였습니다. 고흐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러셀은 진중하고 강인하지만 친절한 사람이야.” 파리를 떠난 뒤에도 고흐는 러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고갱과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여전히 열심히 그림 그리고 있지? 혹시 원한다면 동생 집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하나 가져가라고. 선물을 주고 싶어.” 성격이 까다로웠던 고흐도 극찬할 정도로, 러셀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쾌활했고 친구들을 아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물론 이런 성격에는 그의 경제적 여유도 한몫했을 겁니다.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러셀은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팔거나 전시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굳이 그림으로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없었고, 작품 판매가 간절한 동료 화가들과 경쟁해서 그들의 몫을 빼앗는 것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중이나 갤러리, 상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표현의 자유. 러셀은 역사상 대부분의 화가가 부러워할 만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현실이 예술가를 몰아붙여 ‘헝그리 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건, 자신의 그림이 뛰어난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중들은 작품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러셀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러셀은 그 실력에 비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과소평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랑을 만나다
파리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는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작품 ‘생각하는 사람’(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사람이지요. 로댕과 친하게 지내던 스물여섯 살의 러셀은, 어느 날 로댕의 작업실에서 열아홉 살의 모델을 만나게 됩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야말로 조각 같은 외모. 로댕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불렀던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나였습니다. 러셀은 마리아나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러셀의 가족은 마리아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집안이 가난한 데다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젊은 연인에게 가족의 반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4년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섬, 벨 일(Belle Ile)로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말 그대로 경치가 기막히게 좋은 곳. 햇살을 받아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이곳의 바다와 자연은, 인상주의를 추구하며 자연의 순수한 색을 그리는 걸 목표로 삼았던 러셀에게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러셀은 이곳에 큰 저택을 지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200억원은 족히 드는 대공사였지만 러셀의 재력은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섬에 살던 사람들은 영국풍으로 지어진 이 저택을 ‘르 샤토 앙글레’, 즉 ‘영국인의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결혼 생활은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이를 열두 명이나 낳았습니다. 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라, 안타깝게도 열두 명의 아이들 중 여섯 명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러셀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는 내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고, 내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야.”
그렇게 러셀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섬의 아름다운 자연과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한 일상이 그의 그림에 담겼습니다. 집은 시끌벅적했습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때때로 놀러 오는 방문객들의 이야기 소리와 음악 덕분이었습니다.
예술을 꽃피우다
러셀은 이 섬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때때로 몰아치는 폭풍우와 거친 바다까지도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는 러셀에게 무궁무진한 그림 소재였습니다. “저는 자연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자연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기분, 햇빛, 그리고 바다의 변화하는 분위기를 그리는 화가입니다.” 러셀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는 격렬한 파도처럼 물감을 찰싹 때리듯 대담하게 칠하며 색을 쌓아 올렸습니다. 원한다면 충분히 자세히 그릴 수도 있었지만, 러셀은 격동적인 바다의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자체를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추상화, 특히 훗날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 1890년 작 ‘폭풍우 치는 하늘과 바다: 브르타뉴 앞바다의 벨 일’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렇듯 그는 그림 같은 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색(色)을 통한 감정 전달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린 평화로운 분위기의 그림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작은 배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그린 ‘니스만’(1891)은 황금빛 모래사장과 잔잔한 녹색 물결이 어우러진 풍경을 통해 휴가 중인 화가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반면 아내와 아이들을 그린 그림에서 바다는 강렬한 군청색이었고, 정원은 아름다운 노란색과 주황색, 초록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색채로 그린 ‘해변의 소년들, 벨 일’은 기쁨과 젊음, 활력, 자연에 대한 사랑, 가족의 행복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행복의 그림’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색에 관심이 많은 화가들은 러셀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대표적입니다. 러셀이 그랬듯, 모네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친 자연의 형태와 색채에 이끌려 섬을 찾았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건 늦여름의 어느 날. 모네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절벽 꼭대기에 앉아 바다 풍경을 그리던 중이었습니다. 러셀은 그에게 다가가 어깨 너머로 그의 그림을 바라봤습니다. 모네의 화풍을 알아본 러셀은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인상파의 왕자, 클로드 모네가 아니신지요?”
그 말을 들은 모네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친구가 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모네는 “그 섬에 대한 그림은 러셀이 나보다 잘 그린다”고 칭찬했고, 러셀의 가족과도 만나 “러셀의 아내는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네에게 받은 자극은 러셀이 더욱더 색채에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좌절할 때도 많지만, 더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어.” 덕분에 러셀의 실력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섬을 방문한 사람 중에는 러셀보다 열한 살 어린 앙리 마티스도 있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의 대표적인 거장이자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 마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젊은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러셀과의 만남은 모든 걸 바꿨습니다. 후배의 재능을 알아본 러셀은 마티스에게 인상파의 빛과 색채 이론, 모네의 혁신을 소개하고 이를 소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고, 고흐의 그림 두 점까지 선물했습니다. 덕분에 색채에 눈을 뜬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현대미술의 한 장을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 말년까지도 마티스는 스승인 러셀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언급했다고 합니다.
세상이 무너지다
행복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러셀의 아내의 마리안나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러셀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08년 3월 30일, 러셀의 아내 마리안나가 마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러셀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의 막내아들은 훗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세상은 무너졌다. 마치 그가 발을 딛고 살던 세상의 바닥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러셀이 그린 섬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1908년 5월 9일의 안개’라고 적힌 이 그림은 음울한 분위기의 수채화입니다. 청록색, 라일락색, 분홍색의 색조로 그린 숨 막힐 듯한 안개의 모습은 그의 내면에 드리운 깊은 슬픔을 보는 듯합니다. 생명력이 넘쳤던 그의 색은 모두 흐려져 뿌옇게 변해버렸습니다.
이제 러셀에게 그림은 더 이상 삶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나날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파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붓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비탄에 잠긴 러셀은 결국 극단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400점에 달하는 그림을 거대한 불길 속에 던져 모두 불태워버린 겁니다. “아버지는 마치 이단 심판에서 마녀를 불태우듯이 그림을 태워버렸다.” 그의 딸은 회고했습니다. 로댕에게 보낸 편지에 러셀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 그리고 러셀은 건축비의 10분의 1도 못 미치는 헐값에 집을 팔아버린 뒤 섬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러셀은 삶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겉보기에 꽤 괜찮았습니다. 그는 4년 뒤 재혼했고, 영국을 거쳐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해안가에 오두막을 하나 산 뒤 정원을 가꾸고 낚시를 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때로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러셀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친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맹이가 빠져버린 채 공허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렇게 러셀은 세상에서 잊힌 존재로 살았습니다.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간 미술계와 거리를 둔 데다 작품도 거의 다 태워버려 거의 남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재정 형편도 말년에는 많이 어려워져 있었습니다. 간혹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러셀은 1930년 4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부고 소식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러셀이라는 이름이 다시 주목받은 건 20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미술사학자들은 그가 추구했던 순수한 인상주의 기법, 그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인상파에 미친 영향력에 주목했습니다. 프랑스의 인상파 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인상주의 운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재조명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지금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파 전시도 프랑스와 미국의 인상파를 함께 다루는 전시입니다).
러셀은 색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통해 사랑했던 이들과 자연이 주는 기쁨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고흐에게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줬으며, 모네와는 예술적 영감을 나누며 인상파 발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티스라는 위대한 화가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모네의 순수한 프랑스 인상주의와 마티스의 야수파를 잇는 다리였습니다.
다만 오늘날까지도 화가 러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미술관의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잃은 뒤 러셀이 자신이 쌓은 성취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러셀을 더욱 인간적으로 보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의 이야기와 남아있는 몇 점의 작품들에서, 한 사람이 살았던 삶의 사계절과 희로애락을 온전히 경험하게 됩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The Lost Impressionist: a biography of the life of John Peter Russell(Elizabeth Salter 지음), <A Remarkable Friendship: Vincent Van Gogh and John Peter Russell >(Ann Galbally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다음주에는 오늘 기사에도 잠시 등장했던 색채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와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