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이야기/옌스 아네르센 지음·서종민 옮김/436쪽·2만4000원/민음사
장난감 산업도 비슷한 처지를 겪었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다. 덴마크 장난감 기업으로 아날로그 장난감의 대표 격인 ‘레고’는 비디오 게임, 스마트폰 게임 시대가 열릴 때마다 위기론에 휩싸였다. 하지만 레고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결코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레고 이야기’는 1932년 설립 이후 “사람들의 내면에 상상력을 제시한다”는 가치를 유지하면서 혁신을 멈추지 않았던 레고의 93년 역사를 담았다. 레고 창업자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 2대 회장 고트프레드, 올레의 손자이자 3대 회장인 키엘에 이르는 설립자 가족의 일대기를 밀도 높게 풀어냈다. 앞서 덴마크 왕 마르그레테 2세,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의 일생을 정리했던 전기 작가가 썼다. 이번 책은 레고의 공식 승인도 받았다.
이 책은 레고의 공식 기록 보관소에서 발굴한 자료 등을 토대로 구체적인 사실을 풀어낸 것이 강점이다. 창업주 올레가 기존 나무 블록을 플라스틱으로 교체하면서 혁신을 이룬 과정이 대표적이다. 생산 체계를 바꾸는 비용이 회사 재정을 크게 위협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달려가서 미국제 성형기기의 시연회에 참석했고, “현기증 나게 비싼” 주형 기계를 덜컥 주문했다.1978년 출시돼 레고 역사를 다시 쓴 ‘미니 피규어’ 일화도 인상적이다. 이전엔 단지 ‘건물을 짓는’ 장난감이던 레고는 미니 피규어 출시 뒤 ‘무한한 역할극의 가능성’을 위한 장난감으로 도약했다. 이는 레고의 오랜 과제였던 여아들의 마음을 사는 데도 한몫했다. 레고는 “여자아이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사물에 인간성이 있어야 하고, 앉히고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분석을 토대로 인간형 미니 피규어를 출시했다고 한다.
이 밖에 레고가 미국에 진출하며 협력자로 샘소나이트를 택한 결정은 패착이 됐지만, 20년 뒤 맥도널드와 손잡고 미국 시장을 개척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보수적인 경영진이 쌍수 들고 반대했던 ‘스타워즈’ 협업 상품이 결국 레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눈길을 끈다. 다양한 고난과 극복의 서사가 한 편의 소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서술로 몰입도를 높였다.
저자는 1년 반에 걸쳐 3대 회장 키엘과 인터뷰를 진행해 책에 실었다. 세계적 경기 침체로 인한 장난감 수요 하락, 내부의 혁신 정체가 뒤얽힌 1970년대 초반 상황에 대해 키엘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회장이던) 아버지의 기백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순간에 속도를 늦추는 사람이 됐고, 더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듯했습니다.” 인간적인 회고와 솔직한 고백으로 자칫 건조할 수 있는 기업 역사에 서사를 더했다.수많은 역경에도 살아남은 레고는 오늘날 ‘블록형 장난감’을 일컫는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레고가 그런 지위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키엘의 답변에서 엿볼 수 있다.“할아버지는 상황이 가장 나쁘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도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도요. 일종의 고집이 대대로 내려오는 겁니다. … 이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자 내가 책임지는 모든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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