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는 국제 미술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중동이 더 이상 ‘잠재력 있는 시장’이 아닌 당장 선점해야 할 ‘현실적 투자처’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프리즈와 함께 양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아트바젤이 카타르 상륙을 선언했고,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사 소더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근 첫 경매를 열었다. 구겐하임, 퐁피두센터 같은 유수의 미술관까지 사막 한 가운데에 둥지를 트는 등 세계 미술계가 ‘21세기 유전’으로 문화 권력을 제시한 중동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아트바젤은 20일(현지시간) 카타르스포츠투자청(QSI)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내년부터 카타르 수도인 도하에서 ‘아트바젤 카타르’를 출범한다고 발표했다. 노아 호로비츠 아트바젤 최고경영자(CEO)는 “국제 미술시장의 성장과 예술가에 대한 지속적 지원, 새로운 컬렉터 형성은 아트바젤의 핵심 사명”이라며 “중동 및 북아프리카(MENA) 예술 생태계의 질적 도약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아트바젤 카타르는 내년 2월 도하의 문화역사지구인 므쉐이렙에 위치한 문화공간 M7에서 열린다. 참여 갤러리 수는 50여개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갤러리와 함께 지역 갤러리들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여개 안팎의 갤러리가 한 데 모이는 아트바젤의 다른 아트페어를 고려하면 작은 규모인데, 침체된 업황 등을 고려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아트바젤 측은 “중동 예술의 다양성을 경험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트바젤부터 소더비까지 “Go MENA”
글로벌 미술시장은 이번 아트바젤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스위스 바젤(1970)에서 시작해 미국 마이애미(2002), 홍콩(2013), 프랑스 파리(2022)를 거쳐 아트바젤이라는 브랜드가 다섯 번째 도시로 도하를 선택한 결정에서 시장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판이 열리면 중동 지역은 오일머니를 들고 소비자 역할로만 참여한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이 중동으로 향하는 건 아트바젤이 처음은 아니다. 크리스티와 함께 미술품경매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소더비는 지난해 11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인 리야드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올해 초 첫 경매를 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첫 국제 경매로, 출품작 117점 중 77점이 낙찰되며 173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부진한 업황 속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아트바젤과 글로벌 투자은행 UBS가 지난달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미술시장 총 매출액은 575억 달러(약 81조원)로 전년 대비 12% 감소했다. 중동 지역의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은 아직 1% 미만으로 일본이나 한국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술작품 유통의 큰 축인 1차 시장(아트페어·상업화랑)과 2차 시장(미술품 경매)을 각각 주도하는 아트바젤과 소더비가 긴축 대신 투자에 나선 것이다.
오일머니 → 컬처머니 효과 나오나
국제 미술시장이 본격적인 중동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은 이 지역의 오랜 문화예술 투자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중동 주요국들은 석유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21세기 유전’ 중 하나로 예술을 꼽고, ‘오일 머니’를 ‘컬쳐 머니’로 바꾸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다. 카타르가 ‘국가비전 2030’에 따라 축구 월드컵 유치 등 소프트파워 창출에 열을 올리고, 세계 20대 국부펀드로 꼽히는 아부다비개발지주회사(ADQ)가 지난해 10억 달러 규모로 소더비 지분을 인수한 게 대표적인 예다.
이 결과 중동 지역은 예술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리야드, 아부다비, 두바이 등 중동 부호들이 머무는 대표적인 도시들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이 다녀가는 명소로 탈바꿈한지 오래다. UAE가 2017년 아부다비 해안가에 파리의 상징인 루브르 박물관 분관을 열어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구겐하임 아부다비도 연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알울라 지역에 퐁피두센터의 분관을 2028~2029년에 선보일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점차 중동 시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분위기다. 지난해 미디어아트 기업인 디스트릭트가 카타르 국경일 기념행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사나 카타르’를 선보였고, 서울시립미술관도 최근 아부다비에서 백남준, 이불, 김아영 등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며 한국 미술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매년 3월 열리는 아트 두바이 같은 지역 아트페어는 국내 갤러리들이 한 번씩 들르는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중동 지역 컬렉터의 안목이 높고 한국 미술에 대한 호감이 커 아트페어에 나갈 때마다 성과가 좋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