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리뷰] ▶▶▶ "오스카도, 흥행도 잡자!" 풋내기 영화사 대표의 꿈은 이뤄질까
올해 최고의 드라마를 만났다. Apple TV+의 10부작 드라마 <더 스튜디오>다.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벌어지는 일의 이면을 대놓고 다룬다. 같은 배경의 작품들이 주로 눈을 치켜뜨고 신경질적인 어조로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 것과 다르게 기쁨과 슬픔, 애정과 증오, 웃음과 눈물과 같은 두 개의 감정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요절복통의 에피소드로 담아낸 게 특징이다.
중심에 서는 인물은 콘티넨털 스튜디오의 신임 대표 맷(세스 로건)이다. 영화가 좋아 영화광이 되었고, 작품성 있는 영화 만들기에 기여하고 싶어 영화사에 입사해 말단 직원에서 드디어! 대표 자리까지 올랐다. 입지전적인 이력을 살려 예술 영화를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시켜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길 생각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접촉한 인물이 살아 있는 전설 마틴 스콜세지다.
스콜세지를 면전에서 보니 절로 굽신굽신, 원하시는 영화 무엇이든 만들어주세요. 보무도 당당히 영화사로 돌아왔는데, 맷의 예술영화 야심도 유분수지 ‘바비’ 인형 같은 IP가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데 회장님의 호출에 버선발로 달려가 마주한다. 회장님께서 ‘쿨에이드’라는 스포츠음료 광고의 마스코트를 가지고 <바비> 같은 영화를 만들라고 하니, 맷은 현타를 제대로 맞는다. 영화사 대표로서의 앞날은 이제 가시밭길이다.
스콜세지 감독님 제안은 없었던 거로 해주세요, 손바닥 뒤집듯 구두계약을 파기하자 억! 사람 많은 클럽에서 야단맞는 거로도 모자라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다가 엎어지기를 한 번, 존경하는 론 하워드(<다빈치 코드> <뷰티풀 마인드> 등) 감독님의 4시간 가까운 영화를 두고 결말 줄여달라 했다가 개나리 십장생 쌍욕을 처먹으니, 헉! 의자에서 자빠져 구르기를 또 한 번, 대표가 아니라 감독들의 동네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늠름한 사냥개처럼 대표직에 올랐다가 회장과 감독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애완견이 됐다가 결국엔 비 홀딱 맞은 강이지 꼴로 위상이 하락하는 맷의 처지가 연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다. 맷이 떠돌이처럼 상의는 딱 달라붙고 기장이 넓은 바지를 입는 건 아니어도 잘 차려입은 슈트에 나비넥타이를 두른 모양새가 현대 버전 채플린의 재림이라고 할 만하다.
실은 맷과 떠돌이의 공통점은 따로 있다. 힙스터 같은 느낌의 맷의 차림새는 타인의 눈엔 희극이요, 당사자의 시선에선 비극인 소동을 겪으면서 산발 머리처럼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멋진 영화를 꿈꾸지만, 돈이 되는 영화 앞에서 자존심을 접어야 하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비애의 감정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장의 부품으로 전락한 떠돌이와 같은 현대의 버전으로 제시된다.
이리 채이고, 저리 구르고, 뒤로 넘어져도 코 깨지는 떠돌이나 맷의 초라한 현실을 코미디로 과장해 예술로 승화한 걸 슬랩스틱이라고 부른다. 채플린이 북 치고 장구 치고 스스로 스턴트맨이 되어 원맨쇼를 펼친 것과 다르게 <더 스튜디오>는 출연진 이하 카메라와 음악까지 암수 한 쌍이 되어 원숏 원씬 촬영을 기본 삼아 영화 전체를 스턴트이자 슬랩스틱으로 만들어 버린다. (실제로는 몇 개의 테이크를 하나처럼 보이게 편집했다.)
원숏 원씬은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짧게는 1분 정도, 길게는 작품 한 편을 롱테이크에 담아내는 촬영은 참여한 모든 이들의 치밀한 손발 맞추기에 더해 예상치 못하게 반영되는 현장에서의 돌발적인 상황까지 포함해 ‘영화적인’ 순간을 제공한다. 영화 때문에 구겨진 종잇장마냥 체면을 구기면서도 영화를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맷의 마음이 이 원테이크에 담겨 있다.
[드라마 <더 스튜디오> - The Oner | Apple TV+]
맷을 연기하고 연출까지 담당한 세스 로건은 맷을 포함해 영화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극 중 인물들의 애증의 감정을 묘사하려고 촬영 감독 애덤 뉴포트 베라(<유포리아> 시즌1에서 2개의 에피소드 담당 등)에게 모든 에피소드의 원테이크 촬영을 요청했고, 드러머이자 <버드맨>(2014)의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한 안토니오 산체스에게 원숏 원씬에 맞춰 재즈를 기반으로 한 음악을 즉흥에서 만들고 녹음하게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만든 건 조건 없이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극 중 인물도 그렇거니와 <더 스튜디오>에 참여한 대부분의 이들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베테랑으로서 영화로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고,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쿨에이드’와 같은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공장식의 할리우드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터다.
<더 스튜디오>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은 ‘프레젠테이션’이다. 맷 일행이 시네마콘에 참석해 내년 라인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조이 크라비츠까지 참석해 시네마콘에서 가장 관심 받는 영화사가 될 거라는 맷의 야심은 개뿔! 파티를 즐기겠다며 모두가 약에 취해 칠렐레팔렐레 시네마콘은 뒷전이고, 콘티넨털이 아마존에 매각될 거라는 소식에 각자도생하겠다며 프리젠테이션은 나 몰라라 한다.
이를 해결하겠다고 우리의 영웅, 아니 우리의 불쌍한 맷이 무대에 올라 하라는 신작 프레젠테이션 대신 ‘푸처핸섭’을 외치듯 ‘무비’를 소리쳐 반복하니 이 난데없는 상황에 누가 호응할까, 의문이 무색하게 시네마콘 현장에 모인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비’로 화답해 하나 되는 광경은 그 자체로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무비’라는 마법의 단어 하나면 모든 게 용서되고, 모든 문제도 해결되는 순간이야말로 ‘영화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이자 정의다.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는 모두가 계산속이 된 자본주의의 비극에서 사랑의 가치를 수호하며 순수를 획득했다. 맷 또한 돈의 놀이터가 된 영화판에서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사심 없는 예술가의 마인드로 어쩌면 허울뿐인 대표 자리를 연명하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고 지지하며 믿는 이유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드라마 <더 스튜디오> - Official Teaser | Apple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