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국적의 낭만을 파는 월드컵, 그 이면의 인재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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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논설실] '국적의 낭만'을 파는 월드컵, 그 이면의 인재 시장

월드컵은 국기(國旗)의 경연장이다. 선수들은 가슴에 국장을 달고 국가를 부른다. 관중은 유니폼 색깔로 편을 나누고, 승패는 국가 자존심과 연결된다. 국가대표팀은 국민국가의 상징이다. 하지만 2026년 월드컵의 선수 명단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월드컵은 ‘국적의 낭만’을 팔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인재전쟁이 벌어지는 냉정한 시장이다.

[여기는 논설실] 국적의 낭만을 파는 월드컵, 그 이면의 인재 시장

이번 대회는 사상 처음으로 48개국 체제로 확대됐다. 최종 엔트리만 1248명이다. 이 중 거의 4명 중 1명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아니라 다른 국가를 대표한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은 그대로지만, 그 안에는 출생지, 시민권, 부모와 조부모의 뿌리, 성장 배경, 축구 국적 선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국가대표팀은 더 이상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다. 한 나라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재 네트워크를 얼마나 넓게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성적표가 됐다.
옥스퍼드대 이민연구소(COMPAS)는 이번 월드컵을 역대 가장 많은 외국 출생 선수가 참가한 대회로 분석했다. 월드컵에 첫 출전한 아프리카의 퀴라소 대표팀은 96%의 선수가 외국 출생이다. DR콩고는 85%, 모로코는 73%가 외국에서 태어났다. 48개국 중 8개국은 외국 출생 선수가 대표팀의 과반을 차지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뛰지만, 선수를 길러내고 불러들이는 ‘공급망’은 국경 밖에 있다.
공동 주최국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축구대표팀을 “이민자의 팀(Immigrant Soccer Team)”이라고 불렀다. 대표선수 4명 중 1명이 미국 밖에서 태어났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멕시코에서 태어난 선수가 성조기를 달고 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나이지리아계, 멕시코계 부모, 크로아티아계 조부모를 둔 선수도 있다. 축구장은 출생지와 혈통, 시민권과 정체성이 한 유니폼 안에서 만나는 공간이 됐다.
모로코의 사례는 더욱 상징적이다. 모로코는 유럽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디아스포라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대표팀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벨기에 등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가 부모와 할아버지의 나라를 선택했다. DR콩고, 세네갈, 카보베르데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과거 식민지와 이민의 역사가 오늘의 대표팀 전력이 된 셈이다.
물론 이를 ‘귀화 장사’로 폄하할 수는 없다. FIFA는 2020년 규정을 바꿔 21세 이전 성인 A매치 3경기 이내 출전 선수에게 국적 변경 기회를 줬다. 유소년 대표 경력 하나로 평생 축구 국적을 한 국가에 묶어두는 시대는 지났다. 선수에게도 자신의 뿌리와 기회를 선택할 여지가 커졌다.
‘단일민족’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옌스 카스트로프가 한국으로 축구 국적을 바꿔 홍명보호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독일 연령별 대표팀을 거친 유망주다. 한국 월드컵 본선 경기에 출전한 첫 이중 혈통 선수다. 카스트로프의 태극마크는 한국 축구의 작은 사건이지만 ‘국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큰 질문을 던진다.

[여기는 논설실] 국적의 낭만을 파는 월드컵, 그 이면의 인재 시장

한국은 대표적인 저출생 국가다. 병력도, 노동력도, 심지어 대학 신입생도 줄고 있다. 지역의 인구 기반도 무너지고 있다. 스포츠 인재 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업은 해외 엔지니어를 찾고, 대학은 외국인 학생 없이는 정원을 채우기 어렵다. 지방은 정주 인구 확보를 소멸의 문제로 본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국적관은 여전히 혈통 중심에 가깝다. 귀화 인재와 복수국적, 재외동포 활용은 필요할 때만 꺼내는 예외적인 장치다.
축구의 대표 자격을 일반 이민정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월드컵 선수는 극소수의 스포츠 엘리트다. 하지만 인재는 더 이상 한 나라 안에서만 길러지고 활동하지 않는다. 태어난 곳, 자란 곳, 교육받은 곳, 일하는 곳, 기여하는 곳이 달라지는 시대다. 닫힌 국적관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스포츠만의 문제가 아니다. 월드컵은 국적의 낭만을 보여주지만, 이면에서는 글로벌 인재전쟁이 벌어진다. 닫힌 사회는 좋은 선수를 잃고, 좋은 연구자와 엔지니어도 잃는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이석희 전 SK하이닉스 사장을 수석부사장으로 영입해 파운드리 사업을 맡긴 것도 같은 흐름이다.
저출생과 지방소멸, 산업인재 부족에 직면한 한국에 이민은 더 이상 선의나 동정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한국이 풀어야 할 질문은 ‘누가 순수한 한국인인가’가 아니다. ‘누가 한국에 기여할 수 있고, 우리는 그 사람을 붙잡을 준비가 돼 있는가’다. 인재는 국적보다 더 큰 기회와 더 나은 무대를 따라 움직인다. 이는 월드컵 32강보다 중요한 문제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논설실에서 수석 논설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 정치·경제·국제 이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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