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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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4.25 00:13 수정2025.04.25 00:13

푸른 밤의 여로
-강진에서 마량까지

김영남

둥글다는 건 슬픈 거야. 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가운데 서봐라.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 그동안 난 이런 밤의 옥수수 잎도,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했구나. 여기에서 나는 어머니를 매단 저 둥근 사상과 함께 강진의 밤을 걷는다. 강진을 떠나 칠량을 거쳐 코스모스와 만조의 밤안개를 데리고 걷는다. ‘무진기행’은 칠량의 전망대에 맡겨두고 부질없는 내 시와 담뱃불만 데리고 걷는다. 걷다가 도요지 대구에서 추억의 손을 꺼내 보름달 같은 청자 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의 뜨락에 놓고, 나는 박처럼 푸른 눈을 욕심껏 떠본다.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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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 [고두현의 아침 시편]

김영남 시인은 등단작이자 첫 시집의 제목인 ‘정동진역’이라는 시로 잘 알려져 있지요. 정동진은 우리가 아는 동해안의 그 정동진입니다. 그는 제주를 노래한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세 번째 시집 『푸른 밤의 여로』에서는 고향인 장흥 일대를 집중적으로 보여줬습니다. 특히 표제시 ‘푸른 밤의 여로’는 강진만 햇살에 이마를 반짝이는 두륜산과 달마산, 아름다운 마량항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마량(馬良)은 ‘말을 건너 주는 다리’라는 의미의 지명입니다. 이곳은 7세기 무렵 제주를 오가던 관문이었지요. 조공을 위해 제주에서 실어 온 말들을 중간 방목하던 목마장이 이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생가는 인근 장흥군 대덕면 분토리에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아버지가 한눈을 팔던 ‘두붓집 여인’의 애잔한 사연과 끊임없이 속앓이를 하면서도 남에게는 아닌 척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이 배어 있지요.
보리밭에서 본 어린 날의 추억과 ‘초등학교 졸업반 때 이웃 마을 조숙한 여자아이에게 끌려 저수지 아래 어둑한 논둑길에서 보낸’ 푸른 밤의 여운도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시의 분위기처럼 보름달을 품고 ‘가을 한가운데 서’ 보고 싶어집니다.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 했’던 지난날, 그 쓸쓸함을 품고 강진의 밤길을 걷다 보면 ‘만조의 밤안개’도 ‘칠량의 전망대’도 뽀얗게 되살아나곤 하겠지요. ‘푸른 밤의 끝인 마량’에 이르러서는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량항에서 그의 다른 시 ‘마량항 분홍 풍선’의 한 대목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

그 분홍빛 슬픔의 풍선을 타고 시인이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그는 마량항 부둣가에서 이미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을 예감해버린 것일까요. 타지를 떠돌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출발’과 ‘귀환’의 첫 발자국이 고향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압니다.

올해 여행 계획을 미리 세운다면 시인의 고향인 강진과 마량향에 꼭 들러보길 권합니다. 거기에서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보름달 같은 청자 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에게 건넬까 곰곰 생각하는 것도 참 아름답고 운치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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