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연대기
호미 카라스 지음, 배동근 옮김, 아르테 펴냄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 근처에서 세계 최초의 박람회가 열렸다. 새로운 기술과 기계, 온갖 악기와 과학 기구, 예술품과 공예품들이 모두 휘황찬란한 ‘수정궁’ 안에 진열됐다. 영국이 산업혁명에서 주도적 위치에 섰음을 대내외에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계층인 중산층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박람회 방문객 600만명 가운데는 ‘1실링(현 시세로 5파운드)’ 이용권을 끊고 입장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귀족도 아니고 농부도 아닌 신흥 계급의 탄생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도시 거주자’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제조업, 상업, 은행업, 회계업 등 도시 중심의 직업군으로 생계를 꾸리던 집단이었다. 상업이 발달한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중산층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불러일으킨 튤립 투기 광풍은 유명하다.
서유럽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전까지는 사회 계층 분류가 매우 간단했다. 소득과 복장, 말투를 통해 계층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귀족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임대하여 부를 축적했고, 농부들은 농사를 지었다. 계층 간 이동도 거의 없었다. 영국의 찰스 디킨스 같은 천재조차 ‘하층민 출신 중산층’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글로벌 중산층 연구의 선구자인 호미 카라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이 쓴 ‘중산층 연대기(원제 The Rise of the Global Middle class)’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 사회를 뒤흔든 가장 거대한 사회 계층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현재 직면한 위기를 종횡으로 탐구하는 역작이다. 그는 세계은행 출신으로 2006년 ‘중진국 함정’ 이론을 제시하며, 중산층 육성과 민주주의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산층은 누구일까. 가난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경제적 걱정에서 벗어난 부자는 아니다. 좋은 집과 자동차를 갖고 있고 일정 수준의 여유와 자녀 교육, 여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집단이다. 저자는 중산층의 기준으로 ‘소득’ 대신, 실제 생활 수준을 반영하는 ‘일평균 지출’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1인당 하루 12달러부터 120달러까지 지출하는 사람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 기준은 2017년 남미에서 경기 침체를 겪고도 빈곤 계층으로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지출 하한선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현재 지구촌의 중산층 인구는 40억명 이상이다. 1820년대에는 1%도 되지 않던 이들이, 200년 만에 인류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셈이다. 중산층이 최초로 10억명을 돌파한 것은 1975년으로, 산업혁명 이후 150년이 걸렸다. 이후 2006년 20억명, 2014년 30억명, 2022년 40억명을 넘어섰으며, 2030년 50억명에 달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서구와 일본이 최초의 10억명을, 이후 한국과 동아시아, 중국, 인도 등이 차례로 10억명씩 쌓는 ‘물결’을 이루었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중산층을 두텁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건다.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이유다. 실제 중산층은 지난 200년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또한 ‘사회계약’의 핵심이기도 하다. 누구나 노력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기회가 제공된다는 전제는 사회 결속을 유지하는 중요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은 자신을 중산층이라 인식하거나 중산층이 되기를 열망한다. 미국 상무부는 2010년 ‘미국의 중산층’에서 중산층의 특징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꼽으며 ‘계획과 저축’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산층 신화는 곳곳에서 균열을 내고 있다. 세계화와 인공지능(AI) 혁명,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인해, 중산층도 디지털 경제에 속한 고소득·전문가 계층과 돌봄 경제에 속한 노동자 계급으로 쪼개질 위험에 놓여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은 서구 중산층의 쇠퇴를 가져오며,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피즘 같은 정치적 결과물을 낳았다는 분석이다. 또한 중국과 터키, 이란과 같은 신흥 중산층은 민주화를 촉진하지 않았고, 헝가리와 폴란드, 브라질, 인도에서는 소수자 보호에 반대하는 흐름을 보인다. 근면과 성실, 자유, 인내 같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중산층이 해체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다.
따라서 저자는 중산층을 새롭게 복원하는 일이 인류의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무너진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바로 세우고,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위기에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행복한 중산층을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주장도 새겨들을 만하다. 미래의 승자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중산층이 질투하면서 모방하고 싶어 하는 나라라는 얘기다. 보수와 진보 같은 이념적 대립을 넘어 중산층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는 일이 우리에게도 시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