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현수]벼락거지는 이제 그만

1 day ago 2

김현수 경제부장

김현수 경제부장
“지금 미국의 20대는 역사상 가장 많이 화가 난 20대일걸요.”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후보 지지 집회를 취재차 찾은 적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뉴욕에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20대 젊은 청년이 보이기에 신기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지지 이유를 묻자, 갑자기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그나마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지만 친구들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월세와 생활비가 너무 올라서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미국 경제 성장률이 높은 편인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주식이나 집을 보유한 일부만 부자가 되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산 인플레이션의 상흔

그와의 대화는 정치 지형을 떠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자산 인플레이션이 남기는 상흔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뉴욕은 기본적으로 집값과 월세가 수십 년 동안 가파르게 올라온 도시지만 팬데믹 전후 상승률은 연일 기록 경신 수준이었다. 이런 자산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경제적 부담을 떠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 직업을 고르는 기준, 결혼에 대한 관점 등 사람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트라우마 수준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뉴욕만큼 부동산 폭등기를 지켜본 서울도 그 후유증이 대단하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비교적 탄탄한 직장을 가져도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가질 수 없다는 허탈감과 무력감이 대다수를 짓누르고 있다. 오죽하면 하루아침에 부동산 유무에 따라 확대된 빈부격차에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특히 서울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집값을 부채질하고 공포 심리를 자극해 왔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나라들의 자산 인플레이션 양상과 다른 지점이 있다. 금융 당국이 가계 부채를 관리할 필요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실수요자가 자신의 담보로, 시장 금리에 따라 대출을 받으려는 것까지 규제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규제 시그널이 패닉 바잉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규제보다 공급에 방점 찍혀야

2019년 12월 서울 전역을 투기과열지구로 묶어 15억 원 이상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금지했던 규제가 대표적이다. 15억 원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었고, 애꿎은 실수요자들마저 자기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 정책이었다. 결국 현금 부자들만 서울 고가 주택에 접근할 수 있었다.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경험치만 쌓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 부동산이 들썩이는 것도 추가 규제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주담대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 토지거래허가제 등 규제가 확대될 가능성에 연일 서울 곳곳의 부동산에 매수가 빗발치고 시장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불장’ 우려에 새 정부는 은행 규제를 통해 주담대 총량을 조절하려는 규제를 검토한 상태다. 금융 당국은 은행들을 불러 주담대 대출 금리를 낮추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에 신용이 탄탄한 주담대 금리가 자영업자 대상 대출 금리보다도 높은 역전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실수요자들이 불필요한 이자 비용을 더 내는 피해로 이어지는 셈이다.

안정적인 거주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를 어렵게 만드는 부동산값 폭등의 상흔은 오래가고 여파가 크기에 새 정부가 중점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수요를 억누르는 데 방점이 찍히면 규제 신설이나 폐지 시그널 때마다 시장의 변동성을 높인다. 결국은 시장 수요자들이 원하는 공급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 가능한 공급에 방점을 둔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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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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