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초대석]“대통령 됐다고 국민 뜻 독점하고 야당 배격하면 독재”

3 weeks ago 15

아시아 최초 ‘칼 도이치’상 수상 권형기 교수
“선거 승자만 국민 뜻 체현” 안 돼…논쟁과 설득으로 함께 ‘형성’해야
이를 막는 파괴적 양극화 해결 위해…양당 간 신뢰의 ‘버퍼존’ 만들어야
개헌만으로 모든 문제 해결 안 돼…행정부 수반 조정능력은 강화해야

권형기 서울대 교수는 9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선거에서 당선됐다 해도 그 대통령만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국민의 뜻은 대통령과 야당,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적 논쟁을 통해 함께 ‘형성’해 가야 하지만 우리 정치의 파괴적 양극화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권형기 서울대 교수는 9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선거에서 당선됐다 해도 그 대통령만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국민의 뜻은 대통령과 야당,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적 논쟁을 통해 함께 ‘형성’해 가야 하지만 우리 정치의 파괴적 양극화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대선 날 당선됐다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국민의 뜻(people’s will)이 오직 대통령에게만 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9일 3시간여의 인터뷰에서 우리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던진 화두는 이 물음이었다. 그는 “선거로 국민의 뜻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설사 99%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 99% 내부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의견 차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자신만이 온전히 국민의 뜻을 체화했다며 독점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대통령 개인의 의지가 혼재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상대 당을 배격하는 것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계기로 드러난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 민주주의 위기를 연구해온 권 교수는 지난달 아시아 정치학자 중 처음으로 세계정치학회(IPSA)가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칼 도이치’ 상 수상자로 선정됐다.》―선거에서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아 승자가 되는 것 아닌가.

“국민의 뜻은 선거 날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답하는 유권자마다 다 다르다. 다수 득표로 당선됐다고 해도 그 대통령만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독점하고 다른 진영의 의견은 다 틀린 것이라 배제하면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선거로 당선됐던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가 스스로 ‘차베스, 너는 더 이상 차베스가 아니다. 너는 국민’이라고 말했던 걸 떠올려 보라.”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건가.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군사쿠데타나 전복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뜻은 원래부터 명확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이 경쟁적 논쟁을 통해 함께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자신만이 국민의 뜻을 알고 체현하고 있다고 믿으면 국민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뜻을 앞세워 사법부를 장악하고 비상대권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에 더해 세계에서 정치적 양극화 문제까지 가장 심각한 나라들이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

“한국과 미국의 정당은 정서적으로, 이념적으로 양극화돼 있다. 선거 이후 국민의 뜻을 독점하지 않으려면 대통령과 야당이 토론하고 서로 설득하며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원성을 전제로 한 대화를 우리 정치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 파괴적 양극화가 사법부부터 시민사회까지 모두 ‘정치화’하고 분열시키고 있다.”

―우리 정치의 양극화가 왜 심각해졌다고 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정권이 서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보라’며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보복의 정치가 이어져 왔다. 양당이 공유하는 가치가 거의 사라졌다. 오로지 다수 득표로 상대를 이기려는, 힘에 기댄 싸움만이 남았다. 선거를 보복의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유권자들의 성향도 정치처럼 양극화돼 있나.

“그렇진 않다.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 분포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여전히 중도층이 불룩한 단봉형이다. 좌우 양극단이 늘어나고 있지만 쌍봉형은 아니다. 유권자 지형에 비해 정치가 지나치게 극단화돼 있다. 우리 사회가 둘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건 양당 극단 지지층의 목소리가 과다 대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심해도 되나.

“아니다. 지금의 정치적 양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시민사회도 더욱 양분될 것이고, 그렇게 중간층이 없어지는 양극단의 쌍봉형으로 유권자 지형이 변하면 민주주의에 정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지금 정치인들이 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여기서 물꼬를 돌려야 한다.”

―어떻게 돌려야 하나.

“파괴적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부서지는 걸 막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정당 간 건전한 논쟁과 경쟁의 ‘정치화(politicization)’가 필요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탈정치화(depoliticization)’가 필요하다. 즉, 경쟁 당사자인 정당 간에 공유하는 중립적 규범과 가치를 두텁게 하고, 이를 건드리지 말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런 신뢰의 버퍼존(완충지대)을 만들어 상호 믿음을 쌓아야 한다. 동네 축구로 비유해 보자. 무조건 승리하기 위해 양팀이 암묵적으로 공유해온 룰을 깨지 않는 것이 탈정치화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사례로 설명한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당시 헌법에 대법관 숫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임명하는 대법관 수를 늘려 대법원을 자기편으로 바꾸려 시도했다. 미국 정치가 지켜야 할 관례, 규범을 깨려 했다. 바로 이런 행태가 정당 간 건전한 경쟁의 토대를 갉아먹는 원인이다. 트럼프 시대에 이런 토대가 무너지면서 파괴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임명도 그런 사례인가.

“전례 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신뢰를 깼다는 점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권한대행은 대통령이 아니고 현재는 권력 교체기다. 이런 시기엔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지 않는 게 관례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선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나.

“축구도 룰을 자꾸 깨면 심판이 필요하듯 두 번째 방안으로 정치가 법을 어기면 사법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사법 의존은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사법이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돼야 한다. 세 번째 방안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 사회는 진영에 따라 ‘너의 팩트는 나의 팩트와 다르다’며 갈라졌다.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가 당파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팩트부터 지향하는 가치까지 우리 사회가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중립지대의 범위를 넓히는 탈정치화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강제해야 한다.”

권 교수는 이 대목에서 “내가 민주주의자라 해도 나만이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파괴하고, 결국 나만 남으면 그것이 바로 독재라는 점을 우리 정치권이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 방안으로 개헌을 거론한다.

“개헌엔 찬성한다. 그러나 개헌만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현재 개헌 논의는 놓치는 게 많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됐다고 평가되는 1940∼1960년대 미국과 정치 양극화가 심각한 현재 미국의 차이가 헌법이 달라 일어난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놓치고 있나.

“대통령제가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심플 리액션’이다. 무엇을 하기 위한 민주주의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국가 공동체의 의사를 모아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는 행정부 수반의 조정능력(coordination capability)이 취약한 민주주의는 무능한 민주주의다. 헌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그런 무능한 민주주의는 의미가 없다.”

권 교수는 대표적 사례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했다. 일본은 중대선거구제로 정치 파벌이 난립했고, 그 결과 집권당 당수인 총리의 리더십이 극도로 약화됐다. 권 교수는 “일본은 이를 해결하려 총리의 정책입안 능력과 조정 능력을 강화하는 ‘대통령화(presidentialization)’를 했다”고 말했다.

―일본만의 사례는 아닌지….

“그렇지 않다. 유럽도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통령화’의 경향을 보인다. 나라마다 대처해야 할 문제가 복잡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정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이런 능력이 없는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 결과 이를 극단적으로 해결하려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출현한다. 트럼프 현상 역시 수십 년간 시민들의 불만과 요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 무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엔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개헌을 한다면 유능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약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젠다 세팅, 국정 조정 권한은 강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5년 단임은 짧다. 4년이나 5년 중임을 통해 저출산, 지방소멸, 부동산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구조개혁을 추진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또 국회와 행정부 간 교착을 막기 위해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켜야 한다. 집권당의 정책 안정성을 위해 부통령제도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막을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

“절대 오해하지 말라. 모든 권한을 강화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려 사법기관을 동원하는 것 등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검찰, 감사원 등은 대통령 권한에 두면 안 된다. 국회나 중립적인 기구로 옮겨야 한다. 자기 입맛대로 검찰총장을 교체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제어해야 한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사면을 막기 위해 사면권을 제한해야 한다.”

권 교수의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터뷰를 망설였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모든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쏠려 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나온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민주주의가 회복될까. 한발 멈춰서서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지 본질적 문제를 성찰해야 위기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59)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비교정치, 정치이론, 정치경제학이다. 저서로는 ‘개방과 조정’(2024년), ‘경쟁을 통한 변화’(2021년) 등이 있다. 권 교수가 7월 수상하는 ‘칼 도이치’ 상은 세계적인 정치학자 칼 도이치 전 하버드대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유명 정치학자인 후안 린츠 예일대 명예교수,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명예교수 등이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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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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