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칸의 해변은 영화를 향한 사랑으로 여전히 뜨겁다. 최초로 ‘영화’라는 유희를 발명한 루이 뤼미에르는 “영화는 미래 없는 발명품이다(Le cinéma est une invention sans avenir)”라고 했지만, 그의 이름이 붙여진 뤼미에르 대극장 앞에는 아직도 영화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제79회 칸국제영화제가 12일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에서 개막했다. 여느 때처럼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의 영화인들이 뤼미에르 대극장 앞 레드카펫을 밟았다.
개막식 사회를 맡은 프랑스 배우 아이 헤이다는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영화에 대한 찬사를 읊었다. “나는 우리가 보지 않기를 원했던 것들을 찍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어 심사위원장으로 무대에 선 박찬욱 감독은 이름 없이 헌신한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경쟁작은 22편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들에 참여한 사람들을 다 합치면 아마 몇 천 명은 될 겁니다.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하면 몇 만 명도 되겠죠. 그들의 헌신과 갈망을 명심하며 심사하겠습니다.”
이번 개막식은 칸의 크루아제트 거리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올해는 프랑스 국립영화관연맹(Fédération Nationale des Cinémas Français)과의 협력을 통해 프랑스 전역 950개가 넘는 영화관에서 동시에 칸 영화제의 개막식을 치른다.
이 전례 없는 규모의 집단적 경험 속에서 칸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다. 같은 시간에 극장으로 향하는 행위, 함께 보고 느끼며 서로 다른 감정과 의견을 나누는 경험, 그리고 논쟁까지도 포함하는 집단 예술로서의 영화 말이다.
지난 3월,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며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칸이 추구하는 방향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어떤 경우든 영화제의 역할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있다.”
칸의 개막식만큼 영화의 건재함을 드러내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격식을 갖춘 복장으로 입장하는 레드카펫 행사는 전형적인 형식 그 자체로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란 과연 무엇인가를 확인해 준다.
그것은 방 안으로 배달되는 스트리밍 플랫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상의 옷을 입고 익숙한 공간에서 알고리즘이 선택해 준 내 취향의 동영상을 시청하는 안락한 것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익숙한 곳을 탈주하여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걷는 영화인들의 걸음은 사뭇 결연하다.
안전하고 편안한 개인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저기 어딘가의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는 검은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요란한 옷을 입고 떠들며 함께 극장으로 향한다. 컴컴한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잠시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재미있는 역할 놀이를 해 본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 타인을 경험해 보는 경건한 의식. 그래서 칸의 입성은 떠들썩한 행진이고 의도된 과잉이다. 카메라 앞에 서고, 관객 앞에 서고, 세상 앞에 서는 것. 어둠 속에 함께 앉아 같은 화면을 바라보는 공동의 경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칸은 요란한 행진을 통해 매년 선언한다. 이것은 칸이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식이다.
지중해 햇살 아래 크루아제트 거리 곳곳에는 올해의 공식 포스터가 걸렸다. 1966년형 포드 선더버드 컨버터블에 나란히 앉은 두 여성의 이미지, 바로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이다. 1991년 칸에서 처음 상영된 지 35년이 지나 다시 소환된 이 여성들은 지평선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저 너머는 지나간 시간일 수도, 또는 뤼미에르가 비관했던 ‘미래 없는’ 영화의 불안일 수도 있다.
칸 영화제 측은 포스터의 선정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이를 기억하는 것은 이미 걸어온 길을 축하하는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과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칸영화제가 매년 던지는 메시지는 동시대의 질문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앞에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이 시대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올해 장편 경쟁부문 심사를 맡은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배우 아이작 드 번콜은 개막식 직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힌다. “시민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는 영화라고 할 수 없다.”
한편 영화는 아이러니의 예술이다. 허구를 이야기하며 그 안의 진실을 묻는다. 루이 뤼미에르의 자조적인 고백은 곧 영화의 본질을 꿰뚫는 역설이 되었다. 미래가 없다고 선언된 것이 130년 넘게 살아남았고, 끝없이 죽음을 선고받으면서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텔레비전이 등장했을 때도, 비디오가 나왔을 때도, 스트리밍이 세상을 바꿨을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극장으로 돌아왔다.
올해 칸의 화두도 그 연장선에 있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개막에 앞서 단호하게 말한다. "2026년 영화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AI의 부상, 제작 시스템의 변화, 새로운 세대의 달라진 관람 방식. 질문은 묵직하지만 그의 어조는 흔들림이 없다. "큰 스크린을 위한 영화를 만들려는 영화인들이 있는 한, 영화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이 개막작으로 선택한 피에르 살바도리의 <디 일렉트릭 키스(La Vénus électrique)>는 존재의 불안에 대해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아나이스 드무스티에, 피오 마르마이, 질 를루슈가 출연하는 이 작품은 1928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다.
가짜 영매, 슬픔에 잠긴 화가, 기회주의적 갤러리스트, 그리고 유령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거짓과 착각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사라질 것 같이 연약한 존재의 불안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영화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AI의 시대, 새로워지는 관람 방식이 전통적인 영화 창작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고통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AI에 대항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은 불안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아이러니는 오히려 희망으로 다가온다. 살바도리 감독의 말처럼, 두려움을 아는 자만이 용기를 낼 수 있듯,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은 자만이 살아남기 위해 진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한국 장편 영화가 공식 및 비공식 부문을 통틀어 단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하며 업계 안팎에서 위기론이 대두되던 한국 영화는 올해 반전의 서사를 쓰고 있다. “절망한 거짓말쟁이가 오히려 더 애틋해진다”는 살바도리 감독의 말처럼, 미래가 있을까 의심했던 시간이 가고 거짓말처럼 새로운 작품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4년 만에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추격자>, <황해>, <곡성>으로 칸의 부름을 받아온 나홍진 감독의 첫 경쟁 부문 진출이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되어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다. 정주리 감독의 <도라>는 감독주간에 초청받아 장편 연출작 전편이 칸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석에는 박찬욱 감독이 앉는다. 지난해 칸 무대에서 사라졌던 한국 영화가 올해는 심판석과 경쟁 무대를 동시에 차지한다. 티에리 프레모는 심사위원장으로 박찬욱 감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국 영화를 "영화와 현대성의 거대한 영토"라고 불렀다. 2004년 <올드보이>로 장르 영화가 칸 경쟁 부문에 진입할 수 있음을 증명했던 감독이, 이제 그 무대의 심판석에 앉는다. 위기의 시간을 견뎌낸 한국 영화는 칸의 따뜻한 환대 속에 돌아온다.
허구로 진실을 말하는 것. 죽었다고 선고된 것이 끝없이 살아남는 것. 피에르 살바도리가 <디 일렉트릭 키스>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어쩌면 영화 자체가 가장 오래된 가짜 영매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와 대화하기 위해 극장으로 온다. 사라진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뤼미에르 대극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온다. 그리고 칸의 무대를 열며 배우 아이 헤이다는 선포한다. “오늘 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며칠 동안, 우리에게 어둠의 자리를 남겨둡시다.” 칸의 열두 날이 시작된다.
칸=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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