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진 옷' 80% 할인…명품 '파격 떨이' 나선 이유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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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백화점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최혁 기자

국내 한 백화점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최혁 기자

요즘 해외 명품매장이나 아웃렛 등에선 주요 명품업체들이 큰 폭의 할인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500만원 가까이 하는 구찌 자켓이 90만원대, 600만원 넘는 보테가베네타 코트가 100만원 중반대에 팔리는 식이다. 이미 명품 정보에 빠삭한 해외 직구족들은 저렴한 가격에 ‘득템’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명품업체들은 도대체 왜 이처럼 저렴한 값에 ‘떨이’ 판매를 할까. 최근 들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교체가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하우스 수장인 CD가 바뀌면 브랜드의 전반적 디자인 형태나 브랜드가 표현하는 감성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기존 CD가 만들 낸 지나간 시즌 상품을 빨리 털어내야 새롭게 바뀐 정체성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킬 수 있다는 '속사정'이 있다.

사진=AFP/발렌시아가 홈페이지

사진=AFP/발렌시아가 홈페이지

10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는 샤넬을 비롯해 구찌 디올 셀린느 보테가베네타 지방시 등 10개가 넘는 주요 럭셔리 브랜드들이 새로운 CD를 맞는다. 지난 2년간 발렌티노, 알렉산더매퀸, 라코스테, 끌로에 등에 이어 명품업계에서 CD 교체가 부쩍 잦아진 경향성이 포착된다.

특히 요즘 명품회사들이 새로 고용하는 CD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작은 브랜드에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디자이너들이 많다. 샤넬은 보테가베네타에서 경력을 쌓아 온 마티유 블라지를 새로운 CD로 임명했다. 샤넬의 CD였던 버지니 비아르가 사임한 뒤 6개월여 공석이었던 자리를 40대 젊은 수장으로 채운 것이다. 블라지는 4월에 샤넬에 공식적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샤넬로선 30년 가까이 브랜드를 이끌었던 칼 라거펠트 이후 처음으로 외부 인사를 CD로 영입하게 됐다. 샤넬은 파라펙션 자회사에 600개 이상의 매장과 쿠튀르 스튜디오, 르사쥬 자수공방을 비롯한 전문 아틀리에 그룹을 소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파블로프스키 샤넬 패션 부문 사장과의 인터뷰에서 “샤넬에 색다른 접근 방식을 가져올 마티유의 역량에 대해 확신한다”면서 “브랜드가 고착화됐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다. 마티유의 재능은 오늘도 뛰어나지만 내일은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일을 위한 재능’을 높이 사 영입했다는 것이다.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에 샤넬 광고가 게시돼 있다. 사진=뉴스1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에 샤넬 광고가 게시돼 있다. 사진=뉴스1

구찌도 비슷한 행보다. 구찌는 '명품계의 이단아'로 분류되는 43세의 젊은 뎀나 바잘리아를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했다. 뎀나는 오는 7월 초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조지아 출신인 뎀나는 2009년 메종 마르지엘라에 입사해 여성복 컬렉션을 2013년까지 담당했다. 2015년 발렌시아가 CD로 발탁됐고 스트리트 패션 요소를 발렌시아가에 접목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쓰레기 봉투, 해진 운동화 등을 명품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시장에선 발표 당일 주가가 10% 넘게 폭락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뎀나 영입은 그만큼 구찌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케링그룹은 주요 시장인 중국에서 수요가 감소해 지난해 4분기에만 매출이 24% 감소했다. 같은 기간 도매 매출만 놓고 보면 전년 대비 53% 급감했다. 변화가 시급한 상황에서 발렌시아가에 스트리트 요소 등을 도입해 혁신을 일으킨 뎀나를 영입하며 부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디올은 지난 1월 남성복 디자이너 킴 존스가 떠난 후 새로운 CD를 공식 발표하진 않았지만, 업계에선 조나단 앤더슨이 후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86년생의 젊은 디자이너 앤더슨은 지난 10년 동안 로에베에서 디자인 수장으로 일해 왔다. 비교적 잔잔한 디자인이 특징인 브랜드 로에베를 혁신적 실루엣과 예술적 관점으로 재창조하며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다. 로에베의 시그니처 제품인 퍼즐 백부터 풍선 모양으로 장식된 힐, 신선한 자동차 모양의 드레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LVMH의 셀린느와 지방시를 비롯한 여러 소규모 브랜드에도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69세의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거의 30년 만에 베르사체에서 물러나고 미우미우의 젊은 디자이너 다리오 비탈레로 대체됐다.

지난해 주총 현장에서 이 사장의 패션. 알렉산더 맥퀸의 흰색 자켓과 바지가 눈에 띈다. 사진=뉴스1

지난해 주총 현장에서 이 사장의 패션. 알렉산더 맥퀸의 흰색 자켓과 바지가 눈에 띈다. 사진=뉴스1

명품 브랜드들이 이처럼 파격적 CD 인사로 변화를 주려는 것은 시장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 추정치에 따르면 2019~2023년 동안 연평균 10%의 성장률을 기록한 명품 시장은 올해 약 4%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최대 시장 중 한 곳인 중국은 성장률이 1%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구찌, 디올 등 중화권 소비자 입맛에 맞춰 화려한 디자인을 추구한 브랜드들이 속속 디자이너를 바꾸는 이유다.

기존 디자인 변화가 아쉬운 팬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비싸서 쉽게 구매하지 못했던 아이템을 득템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국내에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주주총회 패션으로 잘 알려진 럭셔리 브랜드 알렉산더맥퀸은 최근 CD를 바꾸면서 지난해 말 최대 80%까지 할인해 재고를 처분했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명품기업들이 변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 CD 교체에서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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