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원조 ‘국민 발라더’ 이상우 변진섭의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두 사람이 있다. 둘 사이 ‘심리적 거리’가 아주 가깝다. 그 간격은 확실하게 수렴해 왔다. 아주 오랫동안. 세월과도, 만난 횟수와도, 연락이 뜸했는지도 관계없다. 각자의 개성과 기질, 감정 기복도 그 거리를 흔들 변수는 안 된다. 평생 좋은 기운으로 서로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별이 없다고 쏘아붙일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자신보다 잘 나간다고 꽁무니 빼지 않는다. 상대가 잘 되면 내가 신난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은 얘기하지 않는다.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 대한 이해도 역시 최상에서 수렴한 것 같다.
정말 이상적인 관계요, 우정이다. 1980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가요계를 평정한 발라드 슈퍼스타 이상우와 변진섭 사이가 그렇다. 동시대에 활동했으니 어느 정도 친할 수 있겠다 싶은데, 그걸 훌쩍 넘어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 긍정적인 감정 교류가 잘 되는 안전거리다. 이상우가 세 살 많지만, 그 거리 안에서 두 사람은 형이 됐다가 동생도 되고, 친구가 됐다가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 ‘우리’의 시작… 방배동과 스텔라
거의 40년 지기인데도 이상우는 세월이 비켜간 듯한 변진섭을 옆에서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감동적이다.
“진섭이는 늘 그립고,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만나면 제가 무너져요. 2, 3년 전 진섭이하고 골프를 쳤어요. 9홀 끝나고 그늘집에서 막걸리 한잔했죠. 다음 홀 시작하려고 카트를 탔는데 비가 엄청 내려 대기가 길어졌어요. 진섭이가 막걸리 더 하자고 해서 좋아라 마셨는데 네댓 병을 마셔 버린 거예요. 눈 뜨니까 집이야. 매니저한테 실려 온 거죠. 하하하하. 다른 사람하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안 했겠죠. 진섭이를 그리워하던 마음에 술이 거했던 모양입니다.”
변진섭도 이상우가 있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실감한다.
“상우 형하고는 희한하게 접점이 많아요. 친구나, 같이 활동한 동료와도 지금까지 정을 나누고 사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가정도 꾸렸을 테고,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 워낙 다르니까요. 그데 상우 형 사이에 계속 만들어지는 접점이 형과의 거리를 유지시켜 주죠. 가끔 봐도 어제 본 것 같고 어색하지 않아요. 가족한테도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요.”
―정말인가요?
“저는 가수할 생각이 없었어요. 대학(경희대) 다니면서 학교 밴드(탈무드)를 했지만 음악이 좋아서였을 뿐이었거든요. 명동 ‘쉘부르’ 카페(무명 통기타 가수 등용문)에서 노래를 부르다보니, ‘신인가요제’나 ‘강변가요제’ 같은 데 나가 보고 싶다는 정도였어요. ‘우리의 사랑 이야기’도 강변가요제까지 염두에 두고 작업한 노래였는데 신인가요제에 입상해서 일사천리로 앨범까지 준비한 거예요.”(변진섭)
“그 앨범이 초대박으로 터진 거 잖아. 진섭이가 살벌한 애에요.”(이상우)
“상우 형. 내가 공부를 좀 했잖아. 아버지는 경희대 들어간 저를 못마땅해 하셨어요. 음악 때려치고 다시 (대학 입시)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음악 한다니까 등록금도 안 주셨어요. 너무 서러워서 앨범 한 장만 내고 공부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데뷔 앨범에 ‘1집’이 아니라 ‘독집’이라고 썼다니까요. 그런데 그 앨범이 터져 버렸네. (유명 라디오 DJ) 이종환 선생님도 안 된다고 하고, 최성수(가수) 형도 안 될 거라고 했는데 말이죠. 하하하. 가수를 그만둘 수가 없었죠.”(변진섭)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인 10월에 나온 변진섭 데뷔 앨범은 가요계를 강타했다. 그런데 그해 8월 MBC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우가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금상을 차지했다.
―이때 둘이 처음 만난 건가요.
“같이 강변가요제를 TV로 보던 ‘동아’라는 매니저 형이 상우 형을 보고는 ‘쟤 어떠냐? 괜찮지 않아?’라고 하기에 ‘소리 내는 게 너무 좋다’고 했죠. 동아 형이 상우 형 앨범을 제작한다는 거예요. 그때 알게 된 거죠. 우리의 시작이지.”(변진섭)
“인연인거야. 동아 형이 내 매니저였는데 알고 보니 그 매형이 진섭이 소속사 사장과 친구였던 거예요. 그래서 같은 사무실을 썼어요. 거기서 처음 보게 됐죠.”(이상우)
동아 형은 나중에 드라마 ‘겨울연가’ ‘해를 품은 달’을 제작하고 가수 싸이와 이정현을 발굴한 박영석 팬엔터테인먼트 회장이다. 매니저 시절 예명을 ‘박동아’로 지었는데 그의 첫 직장이 동아제약이었기 때문이다.
변진섭 1집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감미로운 발라드로 세상을 살살 녹였다. 대히트곡 ‘홀로 된다는 것’이 밝게 ‘새들처럼’을 부르고 ‘너무 늦었잖아요’로 가슴을 울리더니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으로 다시 듣는 이들 마음을 정화시켰다. 수록곡도 모두 히트했다. 공식 판매량이 180만 장을 넘었다. 요즘 시스템이라면 200만 장이 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가요 앨범 가운데 최초의 공식 밀리언셀러다.데뷔한 해 대표적인 대중음악상인 골든디스크 신인상을 받고 이듬해 대상을 받았다. 데뷔 앨범으로 신인상과 대상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당시 이상우는 1집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속으로 ‘저런 친구가 다 있나’ 했어요. 데뷔 앨범이 100만 장 넘게 팔리고 모든 노래가 가요 순위 차트 상위권에 다 올랐잖아요. (조)용필이 형도 못한 거예요. 보통 천재가 아니다 싶었죠.”(이상우)
―그 무렵 같이 있는 시간이 꽤 됐겠습니다.
“두 회사가 친하니까 같이 행사에 자주 나갔죠. 사실 변진섭의 행사였죠. 진섭이가 잘 나갔으니까 나를 끼워 판 거지. 하하하. 장혜리(‘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누나도 같은 회사 소속이라 셋이 행사 무대에 같이 많이 섰어요.”(이상우)
“아이, 형. 그냥 내가 먼저 길라잡이 된 거죠. 형하고는 그냥 식구였어요. 회사에 작곡하는 형이 우리들 골목대장 노릇을 했는데, 그 덕에 둘이 한 2년 재밌게 보냈죠. 생각만 나면 방배동 카페 거리를 아지트 삼아 뭉쳤어요.”(변진섭)
한참 어울리던 시절이 두 사람의 전성기였다. 이상우는 1989년 초에 낸 1집 앨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에서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이란 노래가 히트를 치며 변진섭과는 또 다른 느낌의 발라드 매력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야기하듯 불러 보자.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나도 몰래
먼 길을 걸어오는 나의 마음
밤이면 행여나 그대 오질 않나
내 맘에 등불이 되고 싶네
….
이슬에 물든 제비꽃처럼
기다리는 꽃으로 피어나네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나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그대 떠난 후 알아 버린 이 사랑 때문에
가슴에 내리는 뜨거운 눈물
실비되어 젖어드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명곡을 주고받았다. 레코드 가게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돌려 가며 노래 좀 들었다는 당시 10대들은 변진섭 곡에 빠졌다가 ‘이상우가 나올 쯤 됐는데’하며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1989년 하반기 발매한 변진섭 2집의 ‘너에게로 또 다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희망사항’ ‘숙녀에게’ 등도 가요 차트 1위를 휩쓸었다. 300만 장 가까이 팔렸다. 2집 마지막 곡 ‘희망사항’ 은 지금 들어도 기가 막힌다. 부른 사람이 당시 젊은이의 이성관(異性觀)을 잘 표현한 가사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소화해서다. 가사에 나오는 ‘무스’를 ‘왁스’나 ‘스타일링 젤’ 로 바꾸면 지금 ‘희망사항 시즌 2’로 발표해도 뜰 것 같다.
<희망사항>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 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수 있는 여자
멋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나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희망사항’의 늪에서 겨우 빠져 나오려는데 이상우의 1990년 2집 타이틀곡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이 다시 사람들을 기쁨의 패닉으로 몰아넣은 기억이 선하다. 사랑하는 여성에게고백하려는 설렘을 담은 이 노래는 지상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를 석권했다. ‘몸치’인 가수가 작정하고 춘, 이른바 피노키오 춤까지 메가 히트였다. 기억해 볼까? 그 노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저기 보이는 노란 찾집
오늘은 그녈 세 번째 만나는 날
마음은 그곳을 달려가고 있지만
가슴이 떨려오네
새로산 구두가 어색해
자꾸 쇼윈도에 날 비춰 봐도
멀쑥한 내 모습이 더 못 마땅한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장미꽃 한 송이를 안겨 줄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머릿속에 가득한 그녀 모습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이 아닐까
어디 한번 뛰어 올라 볼까
오늘은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지 용기를 내야지
대단한 가수들이 대거 등장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가요 춘추전국시대’에 가족 같은 친구가 돼 쌓은 추억을 지금 돌이켜 보면 값지고 특별하다. ‘방배동파’로 뭉쳐 마음을 나누던 때가 엊그제 같다. 당시 둘만 있으면 ‘발라드의 왕자’니 톱스타 같은 수식어는 다 잊고 시절의 낭만을 즐겼다.
“형, 그때 내가 몰던 차 ‘스텔라’도 기억나요?”(변진섭)
“그 차로 나 사당역에 많이 내려 줬잖아. 하하하. 거기서 ‘총알택시’ 잡아 타고 안양 집으로 갔지.”(이상우)
“스텔라 전에 ‘포니 엑셀’을 타고 다녔잖아요. 쉘부르 카페하고 다른 두 군데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면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번 돈 모아 산 거라니까요. 패스트푸드점에서 한 달 아르바이트하면 15만 원 받을 때였어요.”
“그때 회사원 한 달 봉급이 30만 원 정도였어.”
“엑셀 타고 다니다가 1집 앨범 나오고 일주일 만에 스텔라를 산 거예요.”
“그 차 안에서 별 얘기를 다했잖아. 그래도 서로의 음악에 대해선 논쟁하거나 지적하지는 않았어.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으니까. 일찌감치 진섭이는 내 경쟁 상대는 아니라고 못 박았지.”
● 공백 아닌 공백기… 무소식도 고마웠다
가까웠던 사람과 소원해지는 시기가 있다. 자연스럽게 자기 일 하면서 연락이 뜸해질 수 있다. 이상우는 1993년 정규 4집 앨범 ‘체념’과 1997년 5집 활동을 마치고 연예 및 공연 기획과 제작에 뛰어들었다. 2집 활동 이후 독립한 변진섭은 1992년 5집 ‘그대 내게 다시’를 발표한 뒤 2년 여간 후속 앨범을 내지 않았다.
―두 사람 관계에도 공백이 생겼을까요.
“팬들이나 가요계 밖에서는 곡을 안 내니까 공백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일부러 만든 공백은 아니거든요. 활동은 계속 하고 있었죠.”(변진섭)
“공백은 내가 있었지.”(이상우)
“형 알아요? 1993~94년에 일본 활동을 하려고 일본 쪽하고 계약했죠. ‘한류’라는 건 없던 시절인데, 이 일본 회사가 계약만 하곤 바람만 계속 잡더라고요. 심지어 길거리에서 테이프 들고 홍보하라는 거예요. ‘절대 못한다’고 했죠.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내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니 못 하겠더라고요. 원래 계약할 때 조용필 형 다음으로 NHK 연말 ‘홍백가합전’에 출연시켜 준다는 약속까지 했거든요. 그 와중에 ‘X-Japan’이 일본에서 떠 버렸어요.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냥 돌아왔죠. 이후 5, 6집을 냈는데 히트곡이 안 나오니까 ‘변진섭의 공백기’가 되더라고요.”
“나는 회사도 만들고, 방송을 아예 안 했거든. 몇 년간 네 소식이 끊겼는데 그래도 잘 살고 있겠구나 했어.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테지만 걱정은 안 됐고. 언젠가는 보겠구나, 예전처럼 자주 볼 날이 올 거라고 믿었지. 사업 시작할 때도 사람이 참 그리웠는데 그 중심에 네가 있더라.”
● 마침표 아닌 쉼표의 연속
8일 강원 원주시 치악예술관에서 ‘2025 변진섭 전국투어 콘서트(변천사 시즌2)’가 열렸다. 공연 3시간 전 이상우가 대기실에 나타났다. 게스트로 출연해 달라는 변진섭 부탁을 받고 그냥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달려왔다.
“원래 진섭이가 키우는 후배 가수가 게스트인데 너무 미안하다. 자리를 빼앗았네.”(이상우)
“형, 괜찮아. 오늘은 쉬라고 했어요. 하하.”(변진섭)
둘은 10여 년 전, 한 TV 토크쇼에서 오랜만에 만난 뒤로 듀엣처럼 다닌다.
“그 토크쇼 녹화 끝나고 술 한잔하는데 형이 ‘진섭이한테 연락도 못 해 주고, 나 때문에 우리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했잖아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형 말을 듣고 입으로는 ‘맞다, 맞아’ 했지만 속으로는 우리 옛날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변진섭)
“나도 그 일이 계기가 돼서 너가 더 편해졌던 것 같아.”(이상우)
변진섭은 2008년 무렵부터 매년 10회 이상 공연하면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확산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로는 소극장 공연까지 연 30~40회 무대에 올라 명곡들을 들려 주고 있다. 발라드 장르의 한 획을 그은 레전드 동생이 마음을 비우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는 아니지만 팬들과 만난다는 것이 형으로서 대견하고 존경스럽다.
“1년에 공연 30~40회는 기획사와 궁합이 맞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죠. 그만큼 진섭이가 열정을 쏟으면서 팬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획사도 밀고 있는 거지.”(이상우)
―이 대목에서 서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특별하죠. 상우 형은 예나 지금이나 남이 아니고, 옆에 있는 친형이에요. 다른 가수들처럼 경쟁자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사람 자체가 비즈니스 인간형이 아니고 한결같은 사람이에요.”(변진섭)
“너도 그래. 3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이상우)
“형, 나 변 씨여서 자주 변해요. 하하.”
―서로의 삶과 가수 활동의 지향점 안에 서로가 포함돼 있을 것 같다.
“콘텐츠 제작 같은 사업을 하고 있지만 가수로서도 진섭이와 함께 우리 노래를 좋아해 주셨던 팬들을 책임지고 싶어요. 조용필 형이 우리 가수들은 팬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하던 게 생각나요. ‘팬덤’을 가수가 계속 끌고 가야 하는데 국내 가요계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가수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수가 나서야죠. 오래 기다리고 응원해 준 팬들을 위해 진섭이나 저는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싶어요.”(이상우)
이상우는 현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플랫폼을 기반으로 엔터테인먼트와 콘텐츠 제작을 하는 스타트업 ‘고양이수염’ 대표를 맡고 있다.
“맞아요, 형. 고마운 분들이에요. 국내 가요 환경을 보면 옛 가요 팬 분들이 갈증을 풀 만한 곳이나 기회가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방송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잖아요.”(변진섭)
“진섭이하고 무대에 같이 서면 시너지가 생겨요. 거창하게 노래의 확장성이라고는 못 하겠는데, 실제 팬 분들이 같이 있는 우리를 보면서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공연이나 행사를 통해 팬들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우리’가 채우고 싶네요.”(이상우)
“형하고 나의 많은 접점들을 공유하고 싶은 팬들도 참 많을 것 같아요. 둘만의 접점이라고 하지만 넓혀 보면 그 시대의 추억이잖아요. 이상우와 변진섭과 같이 추억 여행을 하는 시간이라면 무척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추억을 활력소 삼아 예전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두 사람을, 발라드 향수를 못 잊는 팬들이 다시 세상으로 불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통은 쌍방향으로 이뤄지면 좋다. 이상우 팬, 변진섭 팬, 구분은 짓지 않는다. ‘이상우 안에 변진섭 있고, 변진섭 안에 이상우 있다’는 마음으로 기대했으면 한다. 그러면 더 신나게 팬들을 찾을 것 같다.
“형, 아직도 저한테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이 변진섭 노래 아니냐고 물어보는 팬들도 있어요.”(변진섭)
“진섭아, 얼마 전에 팬 분이 ‘희망사항, 지금도 잘 듣고 있다’고 하시더라. 하하하. 늘 ‘변진섭 만나기 100m 전’에서 맴돌고 있어야 겠어. 이런 것도 혜택이야.”
적정 거리에서 둘이 한 세트로 새로운 추억을 쌓기에 좋은 조건이 여전히 갖춰져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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