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연의 돌봄과 실버사회] 카네이션보다 '우리 집 돌봄 설계도' 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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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의 돌봄과 실버사회] 카네이션보다 '우리 집 돌봄 설계도' 마련해야

효의 의미를 되새기는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5월의 카네이션 물결을 마주하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전통적 ‘효(孝)’ 관념이 근간부터 해체되고 있음이 통계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제20차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부양의 책임이 자녀에게 있다”는 문항에 찬성한 응답자는 20.6%에 그쳤다. 2007년(52.6%) 대비 20년 만에 절반 이하로 급락한 수치다. 이 같은 지표는 단순히 효심이 퇴색한 결과라기보다, 부양 방식이 가족 내부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넘어 공적 시스템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변화를 불효가 증가하는 현상이 아니라 효도의 방식이 진화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효도는 부모님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존엄하게 나이 들 수 있도록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즉, 직접 돌봄의 신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희생자’에서, 공적 시스템이 부모님의 일상에 원활히 작동하도록 돕는 ‘시스템 관리자’로 자녀의 역할이 변한 것이다. 부양의 짐을 시스템으로 옮기는 것은 부모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족 관계의 질을 지키며 노후의 존엄을 보장하는 가장 현명한 실천이다.

새로운 효도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개인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집 돌봄 설계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지역에서 어떤 의료·돌봄 자원을 활용할 수 있으며, 부모님의 건강 변화에 따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계획하는 과정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포함된다. 첫째, 복지로 웹사이트나 주민센터의 통합지원창구에서 부모님이 현재 등록 대상인지 확인하고, 인근 거점 병원의 재택 진료 가능 여부와 지역 내 일상 지원 서비스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부모님의 건강 상태가 악화할 경우를 대비해 “어느 단계에서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가”를 미리 그려보고, 필요할 때 신속하게 연락을 확보하는 매뉴얼을 마련해둔다. 만약 필요한 인프라가 이미 구축돼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용하되, 만약 우리 지역에 필수적인 서비스가 빠져 있다면 지방자치단체와 국가에 당당하게 확충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법률로 보장한 권리를 가족의 구체적인 일상으로 실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2026년형 효도의 핵심이다.

사회는 이 새로운 효도의 방식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기초를 다져야 한다. 2026년 3월의 전국 시행은 분명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지역마다 준비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지역은 통합지원창구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으며, 의료와 복지 정보가 여전히 단절돼 있다. 개인이 설계도를 그려도, 그 설계도를 실행할 인프라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구조적 과제가 선행돼야 한다. 첫째, 지역 간 재정 격차를 해소해 모든 지역이 최소한의 서비스 기준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재택 의료센터와 지역 돌봄 기관 간 전산 의무기록 공유 및 통합 디지털 플랫폼 구축이 시급하다. 셋째, 최저임금 인상, 사회보험료 지원 확대, 정규직 전환 등을 통해 돌봄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처우를 보장해야 한다.

이번 어버이날은 카네이션 한 송이보다 우리 가족의 안녕을 지켜줄 촘촘한 ‘돌봄 설계도’ 한 장이 더 빛나는 날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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