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새로운 석유”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이 데이터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보험을 기반으로 축적한 한국의 국민 의료 데이터는 세계적으로 드문 전략 자산이다. 특정 병원이나 일부 환자군의 표본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진료, 처방 등 의료 이용 기록이 비교적 표준화된 형태로 오랜 기간 축적된 나라는 드물다. 개개인의 질병 발생, 치료 과정, 예후를 시간 흐름에 따라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성과 연속성까지 갖췄다. AI 시대 의료는 물론 바이오·헬스 산업의 주도권까지 좌우할 국가적 핵심 자원이다.
문제는 이렇게 귀한 자산을 사실상 묵혀두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국민건강보험법 등 관련 규제는 복잡하게 중첩돼 있고, 기준은 불명확하며, 책임 부담은 과도하다. 거대한 금광에 앉아 있으면서도 삽을 제대로 대지 못하는 형국이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는 결코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니다. 의료 정보는 가장 민감한 정보에 속한다. 유출과 오남용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보호를 명분으로 정당한 활용까지 틀어막는다면 시대착오적 오류다. 의료 데이터는 잠가 두기만 한다고 해서 보호되는 자산이 아니다. 오히려 안전하게 활용할 정교한 제도를 갖출 때 비로소 공공의 자산으로 가치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지난해 말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 연구의 문턱을 낮추겠다”고 발표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보건의료 분야 가명정보를 활용한 연구와 기술 개발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을 개정한 게 핵심이다. 논란이 많던 사망자 의료 데이터 활용 기준을 일정 부분 정리했다는 것도 성과다. 하지만 이번 조치는 문턱을 조금 낮춘 정도일 뿐 문을 열었다고 보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가명 처리를 전제로 한 제한적 활용이며, 연구 목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의 조건부 허용에 가깝다. 여전히 기관별 승인, 목적 외 이용 금지 등 데이터의 수집·결합·활용 전 과정에 복잡한 절차가 촘촘히 얽혀 있다.
한국은 심의기구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안전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비식별화 체계와 연구비 지원 조건을 통해 의료 데이터 공유를 적극 유도한다. 보수적인 규제 전통이 있는 유럽연합(EU)조차 접근 경로를 엄격히 설계하되, 그 틀 안에서는 데이터 활용을 최대한 넓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건강의료 빅데이터를 중요 기초 전략자원으로 규정하고, AI와 연계한 산업 고도화를 국가 주도형 모델로 추진 중이다.
한국이 놓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연구 경쟁력이 아니다. 의료 주권의 문제다. 우리 데이터를 스스로 연결하고 학습시키지 못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미국이나 중국산 AI가 우리 국민을 진단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료 판단의 기준, 서비스 방향, 산업의 과실까지 이들의 손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국가 보건의료 체계의 종속화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데이터를 열어도 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열어야 안전하면서도 국가 경쟁력을 지킬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보호와 활용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정교한 비식별화, 엄격한 접근 통제, 분명한 책임 체계를 갖추되 데이터는 더 넓고 깊게 쓰이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귀중한 국민 의료 데이터를 더 이상 창고에 쌓아둔 채 유산으로 보전할 수는 없다. 제대로 활용할 길을 열어야 국민 건강을 보호하고, 미래 산업을 키우며, 의료 주권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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