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프로야구 한화 ‘보살팬’과 ‘마지막 팬클럽’

2 days ago 7

프로야구 한화 안방구장인 대전 한화생명볼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 대전=뉴스1

프로야구 한화 안방구장인 대전 한화생명볼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 대전=뉴스1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애증? 이혼 못 하고 사는 부부 같은 관계랄까….”

프로야구 한화의 팬인 지인에게 그간 성적이 안 좋았던 한화를 바라보는 심정을 물었을 때 돌아온 표현이다. 하위권을 맴도는 참혹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차마 응원 팀을 바꾸지 못하는 마음과, 많은 곡절과 어려움이 있었어도 변하지 않은 근본 애정, 그럼에도 남들만큼 잘하지 못하는 데 대한 미움 등이 뒤섞여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 것이다. 그럼에도 이 표현에서 드러나는 핵심은 이러한 많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헤어지지 않고 있는 그 질기고도 끈끈한 연대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심리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요소 중에는 각자가 겪은 많은 사연과, 다른 이는 모르는 순수와 감동의 순간 등등이 섞여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의 속내를 다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속에는 그 팬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한화 팬들을 통칭하는 ‘보살팬’이라는 표현은 ‘보살’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너그러움 혹은 인내 혹은 관용의 느낌을 담고 있다. 한화 팀을 향한 키워드 중에 ‘5886899678’이라는 것이 있다. 한화의 암흑기를 나타내는 숫자인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꼴찌와 그 언저리를 맴돌았던 한화 순위를 나타낸 것이다. 한화는 1999년 한국 시리즈 우승 이후 프로야구 정상에 오른 적이 없고, 2018년 준플레이오프 진출 이후에는 가을 야구에 진출해 본 적이 없다. 어느덧 만년 하위 팀처럼 되어 버린 한화의 팬들은 그러나 늘 8회말이면 육성으로 일사불란하게 ‘최강한화’를 외치며 성적과 관계없이 뜨겁고도 강렬한 응원을 펼쳐 왔던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와 꼴찌 팀에 대한 응원을 다룬 책으로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다. 일부 내용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스포츠의 순위와 인생의 상관관계를 연관시켰던 점을 보기 위해 다시 펼쳐보았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 시절 출세를 위해 암기 위주 공부를 강요당하고, 그 경쟁에서 이겨 명문대에 입학한 뒤 대기업에 입사한 주인공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휘말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해 퇴사하고 이혼까지 당하는 인생의 파고 속에서, 결국엔 없어진 최하위 팀 ‘삼미슈퍼스타즈’(삼미)를 회고하며 깨닫는 인생의 성찰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삼미는 ‘프로’라는 개념과 사회적 ‘순위’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추구하는 팀으로 그려진다. ‘프로’는 ‘프로정신’을 내세워 젖 먹던 힘까지 짜내게 하는 일종의 착취 이데올로기이며, ‘순위’는 하위권에 대한 경멸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또 다른 장치로 풍자된다. 주인공이 삼미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하는 것은 결국 삶 속에서 세상의 ‘순위’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삼미와 한화는 국내 프로야구 최다 연패(18연패)라는 공동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삼미의 마지막 팬클럽은 소설 속에서 결성되었지만, 한화의 팬들은 현실 속에 건재하다. 한화에 대한 응원은 실제 현상으로 삼미에 대한 소설 속 응원보다 그만큼 더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33년 만에 12연승을 거두는가 하면, 14일 현재 2위를 달리며 오랜만에 가을 야구를 바라보는 한화의 안방구장은 이날까지 올 시즌 35경기에서 31경기가 매진될 정도로 팬심의 폭발 현장이 되고 있다.

성적이 좋아지며 팬들의 방문이 늘어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팬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은 응원을 보내준 것을 보면 거기엔 성적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팀과 팬 사이를 묶어 준 강한 결속력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는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결속력을 이루는 심리적 유대는 각각의 팬 자신들의 독특한 추억과 색깔이 깃든 것이다. 그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도 그것을 지우거나 버릴 수 없다. 이러한 추억과 애정의 고유성과 주체성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왜냐면 우리가 천편일률적으로 믿고 있던 ‘순위’ 혹은 ‘계급’의 위력과 공포에 맞서거나 벗어나 우리가 다른 기준으로도 애정 혹은 응원의 대상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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