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향 새 감독 최수열, 말러 교향곡 완주 나서는 이유는

지휘자 최수열이 항구 도시로 돌아왔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이 됐다. 6년여를 몸담았던 부산시립교향악단을 떠난 뒤 약 2년이 지나고서다. 부산과는 다른 인천만의 음악은 무엇이 될 지 최수열에게 직접 물었다.

한국에서 가장 활약하는 지휘자를 꼽는다면 최수열이 빠질 수 없다. 2023년 부산시향을 떠난 뒤 그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지휘를 맡았을 뿐 아니라 예술의전당 공연 시리즈인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를 진행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있으면서 국악 실험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직을 맡아 후학도 키웠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음악색을 끈덕지게 드러낼 터전이 없었다. 부산시향에서 그가 선보였던 슈트라우스와 라벨을 추억하는 팬들에겐 아쉬움이 컸다.

이젠 달라졌다. 인천시향은 지난해로 예술감독 임기가 끝난 지휘자 이병욱의 후임으로 최수열을 골랐다. 그도 고르고 골라 인천행을 결정했다. 부산시향을 떠난 뒤 7곳에서 감독 제안이왔다고. 선임 직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난 최수열은 9월 26일 아트센터인천에서 선보일 취임연주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피아노와 악보로 채워진 방, 그 한가운데에 놓인 파보면대엔 공연 첫 곡인 에드가 바레즈의 ‘튜닝 업’ 악보가 누워 있었다. “이 곡은 시민들이 현대음악을 흥미롭게 보는 신호탄이 될 거예요.”

아트센터인천은 솔직한 홀...못 하면 티 난다

그간 최수열은 지역 악단을 다시 이끌길 바랐다. 부산시향에서 6년 3개월 임기를 꽉 채웠지만 처음 2년은 기틀을 잡는 데 집중했다. 악단과 음악에 전념했던 기간은 4년 남짓. 한창 재미가 붙었을 때 부산을 떠났다. 부산콘서트홀 완공을 함께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이 때문에 연세대에 가게 됐을 때도 악단 감독으로서의 겸직 가능성을 열어놨다고. “부산시향은 거의 100인조에 달하는 오케스트라였어요. 이 정도면 편성이 아쉬워 못하는 곡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죠. 다음에 맡을 악단도 이 정도 규모이길 원했어요.”

고려했던 악단 조건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악단의 규모요, 둘째는 도시의 매력이었다. 셋째는 악단 운영의 안전성, 넷째는 좋은 공연장이었다. 인천은 부산 다음가는 한국 제3의 도시인 만큼 악단도 몸집이 컸다. 전임 감독이 기반을 잘 다져놓기도 했다. 더군다나 2018년 문을 연 공연장인 아트센터인천도 매력적이었다. “아트센터인천은 고래 뱃속처럼 솔직한 홀이에요. 어떤 홀들은 소리를 좋게 포장해주기도 하는데 여긴 있는 그대로 소리를 전달해요. 잘 내면 잘 내는 대로, 못 내면 못 내는 대로죠. 그만큼 잘 연주해야 하는 공연장입니다.”

인연도 있었다. 최수열은 아트센터인천에서 공연 시리즈 ‘토요스테이지’를 맡으면서 시민들과 오래 만나왔다. 후일담이지만 호흡을 맞춰봤던 단원들도 그를 높게 평가했다고. 이병욱도 자신의 뒤를 잇는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단다. 주변의 지지와 함께 그가 꿈꾸는 시향의 미래는 개성이 뚜렷한 악단이다. 무턱대고 세계 일류를 지향하기보단 인천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살리겠다고. “최근에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교육 프로그램과 체계를 알아봤는데 유럽의 악단과는 또 다른 배울 점이 있었어요. 정해진 그릇과 예산에서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천과 부산은 색깔이 다르다

인천행을 결정하면서 염두에 둔 건 음악으로 풀어낼 도시의 색채였다. 최수열이 떠올린 인천의 색은 잿빛이었다. 선명한 원색도 은은한 파스텔도 아닌, 희망보다는 절망이 가까운 색을 꼽다니, 대담한 선택이었다. “인천은 정체성이 없는 게 정체성이라고들 합니다. 부산과는 달리 무언가 하나를 인천의 정체성으로 꼽기가 어려워요. 제물포를 비롯한 구도심, 송도, 청라와 같은 신도시 등 인천 곳곳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죠. 인천 앞바다도 해수욕장이 많은 부산과는 색감이 다르죠. 게다가 인천은 인천국제공항이 있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해요. 여러 색이 다양하게 섞여 코스모폴리탄적인(범세계적인) 도시죠.” 도시를 양분하는 경인고속국도가 만든 지역 내 단절도 이 도시를 명료한 색감으로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항구 도시를 잿빛으로 그린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영국 극작가인 찰스 디킨스나 작가 T.S. 엘리엇도 런던을 비슷한 색으로 묘사하곤 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암스테르담을 설명하면서 ‘어두운 운하’나 ‘무겁고 낮게 깔린 하늘’ 등의 표현을 붙였다. 잿빛을 떠올리자 음악도 해결됐다.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고 외국인도 많이 들어오는 도시라면 동시대 음악이 재밌겠다고 봤어요. 정체성이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말러가 딱이었죠. 말러도 보헤미안이자 유대인, 오스트리아인이면서 한 곳에 오래 자리 잡지 않았던 게 코스모폴리탄적인 면모가 있었어요.”

최수열과 인천시향은 말러 교향곡 전국 연주에 도전한다. 올 연말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한 뒤 역순으로 교향곡 1번까지 공연하는 게 목표다. 1년에 2~3번씩 연주하면 4~5년이 걸릴 일정이다. 공교롭게 암스테르담도 말러 페스티벌로 말러를 기린 역사가 있다. 말러 시리즈의 백미는 초연에서 1000명이 넘는 연주자가 동원돼 ‘천인 교향곡’이란 별명이 붙은 교향곡 8번이다. 웬만한 지역 악단에선 엄두를 못 낼 규모다. “내년이 인천시향 창립 60주년입니다. 역순으로 연주하면 내년에 편성이 큰 교향곡 8번을 할 수 있죠.”

“현대음악, 애피타이저로 맛보세요”

최수열표 인천시향의 한 축이 말러라면 다른 한 축은 새 공연 시리즈인 ‘어드벤처러스 IPO’다. ‘모험적인 인천시향’이란 뜻처럼 과거엔 맛볼 수 없던 참신한 작품들을 선사하는 자리다. 레퍼토리는 현대와 고전을 안 가린다. 26일 취임연주회 제목도 이 시리즈를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아 알파벳 첫 글자인 ‘A!'로 정했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공연 첫 곡인 ’튜닝 업‘이다. 단원들이 무대에 모였을 때 오보에로 A음을 내며 조율하는 장면 그 자체를 음악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공연이 연습을 재현해버리는 역설이다. 시리즈 마지막 제목엔 ’Z‘가 있을 거라고.

내년 어드벤처러스 IPO 첫 곡도 정해졌다. 작곡가 윤이상의 1966년 독일 출세작인 ’예악‘이다. “이 작품은 서양 현악기로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국악기를 표현해요. 오보에에선 대금 같은 소리가 나오죠. 악기의 소리 조합을 조명한 작품입니다. 이처럼 기발하고 재밌는 음악들을 유명한 곡 사이에 넣어 소개하려 합니다. 너무 길지 않으면서 흥미를 돋우는 작품들로 현대음악에 대한 관객들의 맷집을 키우는 거죠. 요리로 치면 애피타이저와 같다고 할까요.”

최수열은 음악 해석에서 단원들만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쪽이다. 큰 테두리는 자신이 잡되 디테일은 재량권을 준다. “프로 연주자들도 자신이 책임지는 파트에선 나름대로 뭔가를 준비해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제가 생각했던 해석보다 더 좋게 들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때 굳이 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리허설도 공식에 맞추거나 작전 짜듯 소화하진 않아요. 그저 실황에서 자유롭게 연주하기 위해 단련을 하죠. 새가 하늘을 날려면 평소 운동도 계속하고 날개도 점검해야 하잖아요. 막상 날게 됐을 땐 그 과정을 생각하진 않을 테고요.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만들어 나가는 연주도 비슷합니다.”

최수열은 공연장을 찾을 이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클래식 음악은 대중음악과는 또 다른 안정감과 고양감을 줘요. 이런 점에선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죠. 현장감이 중요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홀에서 열리는 공연을 경험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