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의 바흐 '골드베르크'는 왜 쇼팽·리스트가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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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곡마다 화제가 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이번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임윤찬은 18세의 나이에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답하였다는데, 그 계획대로 최근에 그가 무대에 올린 연주는 어린 나이에 시도하기 어려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듣는 이를 놀라게 합니다.

임윤찬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서는 갓 20세를 넘긴 젊은 피아니스트로서 건반 음악의 정점에 있는 이 대곡에 바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은 좀 섣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이 곡을 연주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도 겨우 22세였네요.

지난 3월 3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출처. ⓒSungchan Kim/통영국제음악제

지난 3월 3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출처. ⓒSungchan Kim/통영국제음악제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2단 건반 하프시코드를 위한 변주곡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55세의 바흐가 인벤션, 프랑스 모음곡, 영국 모음곡 등 다양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등 건반악기에 관한 경험을 토대로 그의 작곡 역량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2단 건반(two manuals)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으로, 변주곡 역사상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2단 건반 하프시코드]

요즈음은 원래대로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음반들이 많이 발매되고 있지만, 실제 공연 무대에서는 아무래도 피아노 연주가 주를 이루는데, 2단 건반을 위한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기교적으로 더욱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임윤찬과 같이 초절기교를 보유한 피아니스트에게는 그러한 연주기법상의 까다로움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겠지요.

[키스 쟈렛의 하프시코드 연주]

이 작품의 제목과 관련하여서는 당시 어떤 불면증이 있는 귀족이 바흐에게 작곡을 위탁하여 '골트베르크(Goldberg)'라는 연주자로 하여금 밤에 이 곡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러한 에피소드에 기초하여 종래 이 곡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정확히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으로 읽는 것이 맞겠지만, 흔히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통용됩니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항간에는 이 곡이 수면 음악이라고 하는 오해도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목은 바흐가 붙인 것도 아니고(출판 당시 제목은 그저 '2단 건반 하프시코드를 위한 변주곡'이었습니다) 그러한 제목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그 진위가 검증된 바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흐의 제자 골트베르크는 이 곡 작곡 당시 아주 어린 나이였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요즈음 들어서는 많은 분들이 그러한 에피소드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

이 변주곡은 모두 32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에 아리아로 시작하여 그 후 30개의 변주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다시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가는 다 카포(Da Capo) 구성입니다(후일 베토벤이 그의 30번 피아노 소나타의 3악장에서 주제를 제시하고 변주를 진행한 후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마무리하는 유사한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바흐의 이 변주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이한 점은 바흐의 이 변주곡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아리아 자체가 아래와 같이 모두 32개의 음으로 구성된 아래의 베이스라인의 변주이고, 중간에 배치된 30개의 변주 역시 모두 이러한 베이스라인을 토대로 구축된 변주라는 점입니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베이스라인. /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베이스라인. /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안드라스 쉬프의 강좌 링크)

이번에 임윤찬이 이 변주곡 전곡을 연주한 이후 앵콜로 변주곡의 기초가 된 이 베이스라인만을 짧게 연주하여 주목을 끌었는데, 모두 32개의 음으로 구성된 위의 베이스라인 중 첫 8음은 사실 이전에 헨델이 아래 변주곡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헨델의 샤콘느(HWV 442)]

바흐는 (자신의 변주곡 작곡 실력이 헨델보다 훨씬 뛰어난 것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 동기를 더 확대하여 모두 32개의 음으로 구성된 베이스라인을 구축한 다음, 이를 토대로 아리아를 포함한 모두 32개의 거대한 변주곡들로 이루어진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하였습니다.

[아리아의 탄생]

이처럼 32개의 음으로 구성된 베이스라인을 토대로 32개의 변주곡을 작곡하였다는 점도 공교롭지만, 아리아를 제외한 30개의 변주곡 구조에도 (3위일체 등 기독교에서 완전한 숫자를 상징하는) 3이라는 수자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즉, 30개의 변주곡들은 3개 단위로 묶은 변주곡 세트 1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변주곡 세트의 첫 곡은 (나머지 두 곡에 비해) 비교적 분명하게 느껴지는 주제 베이스라인을 토대로 한 춤 곡(1, 4, 7, 19번 곡), 푸게타(10번 곡), 서곡(16번 곡), 아리아(13번, 25번) 등 다양한 장르의 변주로, 두 번째 곡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하여 토카타 스타일의 매우 외향적이고 기교적인 스타일의 변주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곡은 일종의 돌림노래와 같은 카논 형식의 변주로 각각 구성하고 있습니다.

필자 제공(인터넷 악보 자료 캡처)

필자 제공(인터넷 악보 자료 캡처)

특히 세 번째마다 등장하는 카논 변주곡의 경우 베이스 선율 위로 두 개의 선율이 모방되며 전개되는데(3성부), 모방하는 선율의 음정이 (3번 변주곡의 카논은 유니슨, 6번 변주곡의 카논은 2도, 9번 변주곡의 카논은 3도 등등) 변주가 진행되면서 1도씩 올라갑니다.

필자 제공(인터넷 악보 캡처)

필자 제공(인터넷 악보 캡처)

이렇게 한 음정씩 올라가며 모방되는 카논은 24번 변주곡의 카논에서 8도 모방으로 돌아간 후, 마지막 27번 변주곡 카논은 (2성부로 된 카논의 원형처럼) 베이스 선율이 따로 없이 두 개의 선율로 모방하는 형태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카논이 마무리된 후 마지막 30번 변주곡은 (동일한 선율을 시간차를 두어 모방하듯 결합시킨 카논과 달리) 쿠오들리베트(Quodlibet)라고 하여 여러 선율이 동시에 각자 따로 울리도록 절묘하게 결합하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유명한 선율들을 사용하여 흥겨움을 더한 것이 특이합니다.

곡의 템포에 관하여는 악보에 구체적인 템포 지시가 없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글렌 굴드는 그의 유명한 1981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각 변주곡의 템포가 서로 유기적으로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아래 19번 변주의 비교를 통해 할 수 있듯이 1981년 녹음은 그가 젊은 시절 녹음한 연주와 비교할 때 템포를 비롯한 곡 해석에 적지 않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굴드의 1981년 녹음 관련 템포 구조 노트. / 필자 제공

굴드의 1981년 녹음 관련 템포 구조 노트. / 필자 제공

[1955년, 굴드의 19번 변주1981년, 굴드의 19번 변주]

조성과 정서적 흐름

아울러 이 변주곡은 선율과 박자, 리듬은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조성은 G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즉 전체 변주는 모두 기본적으로 G장조이지만, 그중 세 개의 변주는 G단조로 변화를 줍니다. 그런데 단조로 된 이 세 개의 변주, 즉 15번 변주, 21번 변주, 25번 변주 등은 전체 곡의 흐름에서 분기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리아를 제외한 30개의 변주는 앞서 본 것처럼 3개 단위 변주곡 세트 10개로 구성되지만, 단조로 된 15번 카논 변주까지를 1부로, 그리고 16번 변주부터 30번 변주까지를 2부로 하여 절반을 나눌 수 있습니다.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3-14-15의 3종 변주곡 세트는 특히 인상적인데, 서정적인 13번 변주와 역동적이고 밝은 14번 변주를 거쳐 처음으로 등장하는 15번의 단주 변주로 이어지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정서는 바흐 작곡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코롤리오프가 연주한 14번 변주15번 변주]

곡의 후반부인 2부는 (단조의 15번 변주 이후, 마치 새로운 막을 여는 듯한) 프랑스 서곡 풍으로 된 16번 변주로 시작하는데, 방황하고 고뇌하는 21번 카논의 단조로 된 변주곡과 마치 호방하게 웃는 듯한 23번 변주 등에서 드러나는 대조적인 감정의 진폭이 인상적입니다. [코롤리오프가 연주한 21번 변주23번 변주]

그리고 2부에서는 무엇보다도 (란도프스카가 이 변주곡 전체에서 '흑진주'라고 묘사한) 단조로 된 25번 변주곡이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코롤리오프가 연주한 25번 변주]

깊은 사색의 심연으로 내려간 이 어두운 25번 변주곡 이후 26번 변주곡부터는 매우 급속한 템포로 하늘을 향하여 피어오르면서 (마치 하늘 세계를 묘사하는 듯한 트릴이 인상적인 28번 변주와 하늘의 은총이 아래로 흘러넘치는 듯한 29번 변주 등을 거쳐) 무슨 'drinking song'과도 같은 즐거움과 만족감으로 충만한 마지막 30번 변주로 2부가 마무리되고, 마치 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오듯 (아니면 한바탕 꿈을 꾼 후 깨어나듯) 다시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오며 변주곡은 끝이 납니다.

임윤찬표 골드베르크 변주곡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는 이 작품에 담긴 이러한 다양한 감정이나 정서의 대조와 변화를 (템포 루바토와 다양한 다이나믹스의 변화 등을 가미한) 과감한 필치를 통해 매우 극적으로 표현해내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곡 아리아와 1번 변주부터 낭만적인 자유분방함이 단번에 감지되어 그가 이 변주곡을 어떻게 풀어낼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는데, 내성부의 골격을 선명히 드러내는 왼손 피아노와 매우 유연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꾸밈음과 다이내믹한 대조 등 종래 그의 다른 작품 연주에서도 보여준 임윤찬 특유의 개성적인 타건이 이 작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복구의 연주 또한 그저 무미건조한 되풀이가 아니라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변화를 주워듣는 이들이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이례적으로 바흐가 악보에 지그 템포로 연주하라고 지시한) 1부의 7번 변주곡(아래 악보 참조)에서는 흥겨운 춤곡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상당히 인템포로 몰아가면서 가끔씩 옥타브 위의 건반을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마치 첼레스타와도 같은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기도 하여, 이전의 슈타트펠트의 참신한 시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7번 변주곡 악보. / 필자 제공

7번 변주곡 악보. / 필자 제공

[슈타트펠트가 연주한 7번 변주곡]

임윤찬은 3개 단위의 변주곡 세트 중 두 번째의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변주들에서는 지금까지의 다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빠른 속도로 연주하며 기량을 뽐냈는데(특히 17번 변주나 20번 변주 등), 다른 한편으로 (바흐가 특별히 안단테라는 템포 지시를 한 15번 변주곡이나 아다지오라는 지시가 부가된 25번 변주곡 등) 단조로 된 변주곡 등에서는 아주 느린 템포를 적용하여 지극히 사색적인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내면으로 침잠하며 극도로 신중하였던 25번 변주곡 연주에 이어 26번 변주곡부터 29번 변주곡까지는 마치 수난 후의 부활이나 승천의 장면을 연상시키듯 엄청나게 몰아붙이면서 매우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표현을 선보이며 (최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그의 스승 손민수의 차분하면서도 경건한 아래 연주와는 또 다른 결의) 독창적인 해석을 들려주었습니다.

[손민수가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다만 페달을 자제한 글렌 굴드, 코롤리오프, 튜렉 등의 순수하고 투명한 연주에 익숙한 분들의 귀에는 마치 쇼팽이나 리스트를 치는 듯한 임윤찬의 어프로치가 매우 어색하게 들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군데군데 (특히 템포를 아주 끌어 올려 연주한 아라베스크 스타일 변주곡들이나 후반부 변주곡들에서는) 페달을 절제하면서 바흐의 천재적인 폴리포니를 좀 더 투명하게 부각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바흐의 스코어 자체가 다양한 해석 가능성에 오픈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이 분명한 '임윤찬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종래 드러나지 않았던 이 작품의 감추어진 매력을 드러내 주는 매우 흥미로운 해석임은 분명하기에 앞으로 하루빨리 정식 음반으로 발매되어 좀 더 나은 음질로 그의 연주를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임윤찬은 이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경우 공연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표현을 선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굴드가 젊은 시절의 연주 이후 말년에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풀어낸 것처럼) 앞으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또한 점점 연륜이 쌓여가면서 어떻게 진화해나가는지 지켜보는 것 또한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 임성우 - 클래식을 변호하다

연주자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감상 링크
1) 주 샤오 메이(신반) - 듣기
2) 슈타트펠트 - 듣기
3) 코롤리오프(구반) - 듣기
4) 튜렉(구반) - 듣기
5) 글렌 굴드(1981) - 듣기
6) 글렌 굴드(1955) -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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