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탄생이라면 뉴올리언스지만, 재즈의 성지라면 바로 뉴욕이다. 1920년대에 시카고에서 주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뉴욕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쳇 베이커, 디지 길레스피 등 재즈를 대표하는 유명 뮤지션들까지도 모두 필수적으로 뉴욕을 거쳐 갔다. 현재에 들어서도 내로라하는 수준급 실력자들이라면 모두 뉴욕에 모이고 뉴욕에서 재즈를 이어가고 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재즈 버스킹 공연마저도 환상적인 그곳, 뉴욕의 재즈를 직접 눈과 귀로 느끼고, 화폭에 담아왔다.
'재즈 갤러리(The Jazz Gallery)'에서 뉴욕의 재즈와 처음으로 마주쳤다. 재즈 갤러리는 1995년에 설립된, 비교적 신생인 재즈 클럽이다. 이들은 'Where The Future Is Present'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나이와 출신,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성을 토대로 더 많은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때문인지, 작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공연장에는 백발노인부터 힙한 차림의 청년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설레는 얼굴을 풍기고 있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재즈 갤러리의 30주년 기념 주간으로서 특별한 뮤지션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뉴욕뿐 아니라 세계에서 포스트밥 색소폰 일인자로 손꼽히는 크리스 포터(Chris Potter), 재즈씬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베이시스트 린다 메이 한 오(Linda May Han Oh), 드럼의 조나단 블레이크(Jonathan Blake)의 트리오 조합. 가히 30주년을 기념할 만한 라인업이었다.
그 덕분에 공연이 시작되고서 내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재즈의 향연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강렬하다 못해 감동적일 지경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를 감싸 안고 밀어주고 부딪히며 흘러가는 즉흥 연주들이 이어졌다.
크리스 포터의 단단한 음색을 기반으로, 세련되고 아름답고 여유로운 연주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린다 오는 그 작은 체구가 인식되지 않을 만큼 온몸으로 베이스를 휘어잡듯 연주하며 강렬한 비트와 솔로 연주를 선보였다. 조나단 블레이크의 묵직한 무게감과 모든 것을 터뜨릴듯한 화려한 드럼 연주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충격으로 남기도 하였다.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재즈를 온몸과 마음에 적시며 번뜩 정신이 들게끔 만들어준, 실로 충격적인 공연이었다.
● 재즈 갤러리(The Jazz Gallery) [홈페이지 가기]
1158 Broadway, 5th floor
(entrance on 27th st)
New York NY 10001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바로 '버드랜드(Bird Land)'. 1949년 브로드웨이 한 클럽의 첫 오픈 공연 헤드라이너로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가 참여했다. 이를 기리고자 찰리 파커의 애칭이었던 'Bird'를 따와 그 클럽의 이름은 'Bird Land'가 되었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번의 리뉴얼과 이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실상부 뉴욕 최고의 재즈 클럽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뮤지션은 리차드 보나(Richard Bona).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며 작사, 작곡, 보컬, 기타, 퍼커션, 신시사이저 등 모든 악기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최고이자 유일무이한 천재 뮤지션이다. 아프리카 카메룬 태생으로서 재즈뿐 아니라 아프리카 민속음악, 보사노바, 팝, 아프로큐반, 펑크 등 장르적 면모에서도 다양하고 특출난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버드랜드 공연에서는 쿠바 출신의 두 뮤지션 헤수스 뿌뽀(피아노, Jesus Pupo), 루드윅 아폰소(드럼, Ludwig Afonso)와 함께하며 쿠반 리듬을 위주로 그의 자작곡을 선보이는 시간을 가졌다. 리차드 보나의 장난기 넘치고 센스 있는 연주 스타일과, '진짜' 쿠바의 정신이 깃든 두 연주자의 쿠반 리듬이 어우러지면서 무척 유쾌하고 재밌는 공연이 이어졌다. 신나는 공연에 흥을 주체하지 못한 관람객들은 일어나서 쿠반 리듬에 맞춰 살사 춤을 추기도 하고 그의 음악을 따라 부르고 열정적으로 호응하며 함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다가도 리차드 보나의 고요하고 순수한 보컬이 홀로 이어질 땐 마치 아프리카 대자연 한복판에 누워 광활하고 검푸른 밤하늘을 보는 듯 마법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공연 막바지에 다다라선 리차드 보나 홀로 무대에 남아 루프 스테이션 하나와 목소리로 공연장을 가득 채워냈는데, 안주하지 않고 더 많은 도전과 모험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그의 음악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리차드 보나의 음악처럼 정말로 '리차드 보나'스러운 공연을 즐길 수 있었던 반짝이는 시간이었다.
● 버드랜드(The Bird Land) [홈페이지 가기]
315 West 44th Street
New York, NY 10036
화려한 버드 랜드를 뒤로 하고, 이번엔 묵직함이 가득한 재즈 성지의 진수를 찾았다. 바로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이다. 1935년 사교클럽으로 처음 개업했던 빌리지 뱅가드는 뉴욕으로 모여든 재즈 뮤지션들의 새로운 등용문으로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 콜맨 호킨스, 델로니어스 몽크, 디지 길레스피, 찰스 밍거스, 소니 롤린스, 빌 에반스, 윈튼 마살리스 등 정말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재즈 뮤지션들이 한 번씩은 거쳐 간 전설적인 재즈 클럽이 되었다. 게다가 최고의 음향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된 뛰어난 내부 구조 덕분에, 유수의 뮤지션들의 라이브 공연을 음반으로 남기기도 하며 재즈 음악사에 위대한 공헌을 한 바 있다.
큰 기대를 안고 방문한 빌리지 뱅가드, 그곳에선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아론 팍스(Aaron Parks)를 주축으로, 색소폰의 벤 솔로몬(Ben Solomon), 베이스의 벤 스트리트(Ben Street), 드럼의 알제이 밀러(RJ Miller) 퀄텟 구성의 공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명성답게 네 사람의 연주는 군더더기 없는 스킬과 센스를 토대로 가히 '재즈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모범적이고 단단했다. 특히 아론 팍스의 수려하고 기술적인 연주가 돋보이면서도, 그의 모든 연주를 빈틈없이 메꿔주는 벤 스트리트의 베이스가 완벽하게 아름다웠으며, 벤 솔로몬의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색소폰 연주가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수학 천재들이 모여 정밀하게 계산하듯 정확하고 기술적인 연주 속에서 빌리지 뱅가드, 그리고 더 나아가 뉴욕 뮤지션들의 현주소를 인상 깊게 느낄 수 있었다.
●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 [홈페이지 가기]
178 7th Avenue South,
New York, NY 10014
고풍스러운 역사적인 명소들과 세련된 현대 스팟들이 다채롭게 모인 뉴욕답게 재즈 클럽들 또한 '전통 클럽'이 있는 반면, 젊은이들의 힙한 감각을 자극하는 '요즘 클럽'이 존재하고 있다. 그 에너지를 느끼고자 방문한 곳이 바로 '메쯔로우(Mezzrow)'.
일단 앞서 방문한 클럽들과 달리 훨씬 더 젊은 연령층이 공연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클럽답게 내부 인테리어에 특히 많은 신경을 쓴 듯 했다. 입구부터 놓여 있는 피아노와 LP판, 오래된 나무 기둥과 거칠지만 앤티크한 벽면까지. 세심한 소품 하나하나,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재즈에 대한 소중한 애정과 손때가 느껴졌다. 그 덕에 눈과 귀로 재즈를 즐길 뿐 아니라, 카메라로 이 모든 '무드’를 담아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전적으로 사로잡은 듯 했다.
이날은 파스쿠알레 그라소(Pasquale Grasso)의 트리오 연주가 이어졌다. 요즘 재즈씬에서 가장 잘하고, 가장 잘나가고, 가장 수준 높은 재즈 기타리스트답게 그의 훌륭한 연주는 메쯔로우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정통 비밥 연주를 기조로 하여 진정성 있는 연주 스타일이 무척 돋보였는데, 파스쿠알레의 화려한 손가락 움직임은 비밥 황금기의 뉴욕을 그대로 옮겨온 듯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그 멋이 있었다. 베이스의 아리 로날드(Ari Roland)는 솔로 부분에서 활을 활용한 연주 기법을 통해 베이스를 가득 안고 온몸으로 문지르듯 연주하는 인상 깊은 모습을 선보였다. 또 드럼의 키스 발라(Keith Balla)는 아주 적은 드럼셋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밌고 혁신적인 연주로 공연장을 가득 채워냈다.
'힙’한 공간에서 정통 비밥의 향취를 가득 느끼며, 현대와 전통의 조화, 가장 뉴욕스러운 재즈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메쯔로우(Mezzrow) [홈페이지 가기]
163 W 10th St,
New York, NY 10014
지역별 재즈의 기원과 흐름이 다르긴 하지만, 결국 미국은 명실상부 재즈의 본고장이다. 그런 재즈가 탄생했던 뉴올리언스에 직접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뉴욕의 버드랜드에서 '하이 소사이어티 뉴올리언스 재즈 밴드(HighSocietyNOJB)'의 공연을 통해 정통 뉴올리언스 재즈를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버드랜드에서 매주 정기적인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상주 밴드로서 이날은 피아노, 벤조/기타, 베이스,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이란 제법 큰 구성으로 만났다. 신나고 경쾌한 리듬을 사용하면서 각 연주자들이 돌아가며 한 번씩 솔로 연주를 선보이는데, 그들의 연륜과 경력이 묻어나는 진한 뉴올리언스 감성이 무척 인상 깊었다. 또 악기 연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연주자들이 직접 보컬로 참여하면서 관객들을 위한 재미를 더하였고, 잔잔한 발라드 장르까지 섭렵하며 분위기를 다채롭게 이어갔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전통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예술의 고점이 모인 예술의 성지 뉴욕. 큰 기대를 안고 방문한 만큼 평소 감상할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공연을 매일매일 만나볼 수 있었다.
뉴욕은 모든 것이 섬세하고, 다양하고, 멋이 있다. 조잡한 구석이 없다. 빠르고 복잡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정성과 깊이가 있었다.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 있는 곳, 아니 사실은 정답 자체가 없는 곳이었다.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과 그들이 꾸려내는 공연은, 그들이 살아가고 활동하는 '뉴욕답게' 누구 하나가 맞고 틀리고가 없이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색깔로, 각자의 최선을 다 해내고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진정한 재즈, 진정한 예술의 멋과 힘을 온 마음으로 간직하기로 한다. 앞으로 필자가 만들어갈 예술의 세계는 더욱 멀고 더욱 자유로운 곳을 향하길 기대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뉴욕 재즈 기행을 마친다.
민예원 '스튜디오 파도나무'의 대표•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