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후반, 서울의 한 낡은 아파트.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고물 신세가 된 채 이곳에 버려져 있다. 어느 날 클레어는 충전기를 빌리기 위해 올리버네 집을 찾아가는데….
인공지능(AI) 로봇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다룬 대학로 대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10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신화를 썼다. 토니상은 영화의 오스카, 방송의 에미상 등과 함께 미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상으로 꼽힌다. 다음달 실제 수상까지 이어질 경우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은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K뮤지컬의 쾌거’로 평가될 전망이다.
◇ 브로드웨이 점령한 韓 뮤지컬
1일(현지시간) 토니상 주최 측인 브로드웨이리그와 아메리칸시어터윙에 따르면 제78회 토니상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뮤지컬 부문 △작품상 △연출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작곡 및 작사) △오케스트레이션(편곡상) △무대 디자인상 △의상 디자인상 △조명 디자인상 △음향 디자인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포함됐다.
한국 뮤지컬 작품이 토니상에서 이 같은 성과를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후보작은 브로드웨이에서 작년 4월 26일부터 지난달 27일까지 공연한 작품을 대상으로 지정됐다. 토니상 시상식은 다음달 8일 오후 8~11시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국내에서 ‘윌휴 콤비’로 알려진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뉴욕대 재학 중 만난 두 창작진은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를 시작으로 ‘어쩌면 해피엔딩’ ‘일 테노레’ 등 굵직한 작품을 공동 개발했다. 2016년 서울 대학로에서 초연한 ‘어쩌면 해피엔딩’은 탄탄한 스토리와 서정적인 음악에 힘입어 국내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다.
미국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건 작년 11월이다. 1000석 규모의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정식 개막해 지난달 27일까지 평균 92% 이상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공연은 내년 1월 17일까지 연장됐다. 오는 10월에는 한국 공연도 예정됐다.
◇ 독창적인 스토리의 힘
이번 성과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스타 마케팅에 기대는 한국의 많은 대극장 뮤지컬과 달리 ‘어쩌면 해피엔딩’은 ‘AI의 사랑’이라는 독창적인 스토리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에 토니상을 받은 한국 뮤지컬과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고 있는 한국 창작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 공연을 건너뛰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을 겨냥해 제작됐다. 작품 자체도 미국인에게 익숙한 ‘아메리칸드림’이 주제다. 앞서 ‘위대한 개츠비’는 77회 토니상에서 의상디자인상을 받았다. 뮤지컬 ‘물랑루즈’와 ‘킹키부츠’도 앞서 토니상을 수상했지만, 이는 CJ ENM이 지분 투자 형태로 프로듀싱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한국 문화를 담으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섬세하게 다뤘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어쩌면 해피엔딩’ ‘모텔’ 등의 한글 단어로 무대를 꾸미고, 요즘 시대의 관심사와 맞아떨어지는 AI를 주제로 완성도를 높인 점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네 편의 뮤지컬 작품상 후보는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동명 영화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어쩌면 해피엔딩’과 함께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뮤지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은 동명의 쿠바 재즈 밴드에 대한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10개 부문 후보에 지정된 ‘죽어야 사는 여자(Death Becomes Her)’는 영원한 젊음을 찾아 나선 뮤지컬 배우의 광적인 이야기를 담은 동명 영화가 원작이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은 것처럼 K뮤지컬도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