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콩쿠르는 그런 목표를 가진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참가했죠.”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K클래식 열풍’을 불러일으킨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한 말이다. 그의 표현처럼 콩쿠르는 10~20대 신예 연주자들이 세계에 자신의 실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 우승을 계기로 명문 음반사인 도이치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2022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한 것을 발판으로 굴지의 음반사인 데카(Decca)와 전속 계약을 체결한 이후 그라모폰상을 받는 등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올해는 신진 연주자들의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하는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밴 클라이번 콩쿠르가 모두 열리는 특별한 해다. 일부 콩쿠르가 4~5년마다 열리고, 코로나19 사태 때 개최가 미뤄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에 이들 대회가 한 해에 동시에 열리는 것은 음악계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퀸 엘리자베스 본선 한국인 13명 진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첫 테이프를 끊는다. 다음달 5일(이하 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장대한 막을 올린다. 1937년 창설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피아니스트 발레리 아파니시예프(1972년),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1989년) 같은 명연주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대회다. 해마다 바이올린·첼로·피아노·성악 부문 등에서 번갈아 가면서 개최된다. 올해는 피아노 부문에서 자웅을 겨룬다.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 진출자 70명 가운데 한국인은 13명으로 중국과 함께 가장 많다. 피아니스트 김동주, 김선아, 김송현, 김준호, 김채원, 문성우, 박진형, 배진우, 선율, 신창용, 예수아, 이재영, 황보강 등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진출자들은 5월 5~10일 본선 무대에 오르며, 이 중 24명이 5월 12~17일 준결선을 치르게 된다. 결선에 진출한 12명은 5월 26일부터 31일까지 기량을 겨룬다. 우승자는 결선 마지막 날 저녁 발표된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는 아직 한국인 우승자가 나온 사례가 없다. 만약 올해 탄생할 경우 퀸 엘리자베스 전 분야 우승자 배출 기록을 쓰게 된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연속 3연패 노려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다음달 21일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개막한다. 1962년부터 4년마다 열리는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을 대표하는 국제 음악 경연 대회다.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1934~2013)을 기리고자 창설된 이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쇼팽, 퀸 엘리자베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버금가는 세계 정상급 대회로 여겨진다. 2021년 대회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된 탓에 이번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예외적으로 3년 만에 열리게 된다.
올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 본선 진출자는 30명이다. 이중 한국인은 2024년 서울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자인 유성호, 2019년 힐튼 헤드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박채영 단 둘뿐이다. 본선 1·2차, 준결선을 거쳐 살아남은 6명의 피아니스트가 6월 3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결선에 올라 순위를 겨루게 된다. 결선이 끝나는 날 밤 우승자가 호명된다. 올해 국내 피아니스트가 1위 수상자로 결정될 경우 한국은 지난 대회(2017년 선우예권, 2022년 임윤찬)에 이어 이 콩쿠르 연속 3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쇼팽 콩쿠르, 10월 20일 우승자 발표
세계 최고의 피아노 경연 대회로 꼽히는 쇼팽 콩쿠르는 10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막한다. 1927년 창설된 쇼팽 콩쿠르는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년),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등을 배출한 덕에 ‘피아노 거장의 산실’로 불린다. 올림픽보다도 주기가 긴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데다, 오직 쇼팽의 작품으로 실력을 겨룬다는 특수성 때문에 해외 주요 외신들도 앞다퉈 다룰 만큼 주목도가 높다. 수상자 명단 발표일이 스타 피아니스트 탄생의 날로 일컬어질 정도다. 이번 쇼팽 콩쿠르는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2020년 대회가 한 해 미뤄진 데 따라 4년 만에 열리는 자리다.
올해 쇼팽 콩쿠르 예선 진출자는 171명으로 발표됐다. 그중 한국인은 24명으로 중국 다음으로 가장 많았으나, 4명이 기권함에 따라 총 20명이 다음달 4일까지 콩쿠르 예선을 치른다. 김선아, 김준형, 김지인, 김하영, 박진형, 박채린, 신효진, 양지원, 여윤지, 유성호, 윤정현, 율리아 나카시마(한일 이중국적), 이관욱, 이기창, 이효, 임주희, 조혜나, 지인호, 지현규, 차준호 등이다. 연주자들은 다음달 4일까지 콩쿠르 예선을 치르며, 이중 약 80명이 본선 무대에 오르게 된다. 독주회 형식의 라운드를 세 번 거치고 살아남은 10여 명의 연주자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결선을 치른다. 시상식은 결선 마지막 무대가 끝난 날 저녁 바로 열린다.
올해 주요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피아니스트의 우승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센다이 콩쿠르 우승자 최형록, 지나 바카우어 콩쿠르 우승자 신창용, 프라하의 봄 콩쿠르 우승자 박진형 등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 연주자들이 대거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쇼팽> 등을 쓴 피아니스트 김주영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다져온 탄탄한 기본기, 한국 연주자 특유의 뚜렷한 목표 의식과 치열한 승부 근성은 경쟁이 만연한 콩쿠르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성질들”이라며 “유수 콩쿠르에서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은 물론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깜짝 스타’의 탄생도 기대해볼 법하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