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과속 쳇바퀴에 갇힌 현기증 사회

2 hours ago 2

총알 배달-새벽 배송에 익숙해진 오늘날 ‘속도 네트워크’ 분석
기술 발전과 금융 자본 결합, 실적 압박-업무 과부하 등
노동자 안전 위협 받아
◇속도비평/이영준 지음/400쪽·2만원·문학동네

속도는 더 이상 특정 교통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과 배송 시간, 응답 시간, 심지어는 인간의 집중력과 감정까지 좌우한다. 책 ‘속도비평’은 속도를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며, 빠른 속도를 떠받치는 노동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저자는 “속도는 더 이상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척도”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속도는 더 이상 특정 교통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과 배송 시간, 응답 시간, 심지어는 인간의 집중력과 감정까지 좌우한다. 책 ‘속도비평’은 속도를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며, 빠른 속도를 떠받치는 노동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저자는 “속도는 더 이상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척도”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주문한 짜장면의 배달이 늦자, 고객이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내 짜장면 불면 어쩔 거야?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거야?” 주인과의 말다툼은 격해졌고, 고객은 이윽고 식당까지 찾아가 주인 부부를 폭행했다. 올 3월 경기 의정부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짜장면이 불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 세계, 다음 날 새벽이면 집 앞에 물건이 도착해야 하는 세계, 상대방의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초조해하는 세계. 우리는 그야말로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속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과학기술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속도를 둘러싼 다양한 장면들을 포착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책은 철도, 공항, 최첨단 로켓 등 구체적인 장소와 기계에 착점을 둔다. 다만 물리적인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사회 구조적, 역사적 맥락에서 속도를 분석했다.

책은 ‘속도 체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이는 속도를 만들어내는 여러 사회적 조건의 집합을 의미한다. 직장에 늦지 않으려고 뛰는 사람들을 보자. 이들은 단순히 ‘늦음’을 피하기 위해 뛰는 게 아니다. 여기엔 상사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 인사고과라는 계약관계, 타야만 하는 교통 시스템, 그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사회의 정상성 등 많은 것들이 관계돼 있다. 즉, 오늘날의 속도는 네트워크 전체가 만들어내는 산물이란 뜻이다.

이 개념은 항공기 등 현대 기계에도 적용된다. 서울에서 제주도를 간다고 치면, 공항까지 타고 갈 택시나 대중교통부터 수하물 처리 시스템, 주기장에서 활주로까지 항공기를 유도하는 인원과 장비, 이 모든 것을 살피며 명령을 내리는 관제 시스템 등이 속도 체인을 이루고 있다. 어느 한 요인에서 예상치 못한 지체가 일어나면 항공기의 속도는 보장되지 못한다. 여기에 스마트 패스 등으로 시간을 단축하면 세상은 점점 더 조밀한 속도 체인으로 뒤덮여간다.

그러나 저자는 ‘더 빠른 이동수단’과 ‘더 빠른 서비스’의 성공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통 체증, 물류 병목, 플랫폼 노동의 과부하, 끊임없는 시간 압박…. 이것들은 모두 빠른 속도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문제다. 빠른 사회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속도를 억제해야 하는 모순도 등장한다. 과속방지턱, 어린이 보호구역, 보행자 중심 도시계획 등의 제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더욱이 ‘속도의 유토피아’인 한국은 그 그늘이 무척이나 짙다. 배송 속도를 자랑하는 업체와, “배송이 빨라서 좋았다”는 소비자들을 잇는 물류센터에선 수많은 인권침해가 벌어진다. 배송 물류센터는 노동자들의 시간당 물량 처리 개수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관리자들에게 보고된다.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갈 때에도 보고해야 하는데, 관리자의 컴퓨터에는 ‘0시 8분 경과’와 같은 메시지가 뜬다.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화장실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이뿐이 아니다. 속도가 최상위 가치인 라이더들에게 안전 규칙은 지키기 어려운 숙제다. 이에 보행자들은 위협받고, 오토바이 소음은 심각해진다. 저자는 “21세기 속도 체인의 성격은 속도기계와 금융 자본의 결합으로 설명된다”며 “그 결과 겉으로는 대단히 밝고 활기차 보이지만, 속은 안전과 인권 등 온갖 요소가 곪아 있는 어두운 그늘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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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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