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편의 위한 수단이지만
국적에 따라 통제 대상 되기도
난민-무국적자는 국경 못 넘어
◇여행 면허/패트릭 빅스비 지음·박중서 옮김/404쪽·2만2000원·작가정신
‘악마의 시’의 작가 살만 루슈디는 2002년 본인의 한 저서에서 여권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 해외 휴가 또는 출장길에 항공권을 끊고 공항으로 향할 때 반드시 챙겨야 할 것임은 분명한데, 루슈디는 여권에 대해 훨씬 큰 무게감을 느낀 듯하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960년대 루슈디가 소지했던 인도 여권엔 방문 가능한 몇몇 나라의 이름이 ‘괴로울 만큼 적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10대 때 영국 유학길에 오르고 몇 년 뒤엔 영국 여권을 취득했는데, 그의 세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게 열렸다. 당시 어딜 가든 환대받지 못하는 인도 여권을 갖고 있다가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누빌 수 있는 영국 여권 소지자가 된 루슈디. 단지 ‘책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오늘날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권리로 세계서 통용되는 여권의 역사와 의미를 짚은 신간이 나왔다. 국적이나 신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여권이라는 책자 자체에 집중했다는 측면에서 미시사를 다룬 교양서적에 가깝다.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영어학 교수인 저자는 여권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의 ‘통행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중세와 대항해시대, 제국주의와 냉전, 난민과 테러의 시대까지 여권은 꾸준히 진화하며 이동의 조건을 설정해 왔다. 개인의 생체 정보를 담는 수준에 이른 오늘날에도 여권은 여전히 사람을 구분하고 선별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저자는 여권이 단순히 여행의 편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특히 근대 이후엔 국가가 개인의 이동을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해 온 정교한 장치라고 말한다. 권력기관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도구였다는 측면에서 여권은 이중성을 가진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누군가는 여권을 들고 세계를 누비지만, 다른 누군가는 통제의 대상이 돼 평생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난민과 무국적자는 영원히 국경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중동 가자지구 전쟁에서 다른 국가의 여권을 가진 이중 국적자가 인종학살 중에도 우선 구출 대상으로 선정돼 먼저 국경을 넘는 등 ‘생사의 국경’이 여권 때문에 나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책은 현대식 여권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부터 등장한 이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발터 베냐민, 해나 아렌트처럼 여권을 잃고 추방당한 지식인이나 전쟁을 피해 국경을 반드시 넘어야 했던 피란민들, 역사 속 군주들, 예술 작품 속 여권에 관한 이야기 등을 두루 담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총망라하며 다소 두서없이 정리한 듯한 느낌도 있으나 각 사례들은 흥미롭게 읽힌다. ‘세계 여권 경쟁력’ 통계에 따르면 한국 여권은 해마다 최상위권으로 평가된다. 큰 문제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어서인지, 어쩌면 우리는 우리나라 여권의 소중함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얇은 책자 하나가 ‘허가받은 자’와 ‘허가받지 못한 자’를 얼마나 비정하게 구분해 왔는지를 알게 되면, 공항에서 여권을 자연스레 내밀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축복받은 일인지 깨달을 것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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