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유언의 효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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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유언의 효력

고대 로마에는 다양한 유언 제도가 존재했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을 정하는 ‘민회유언’, 서면 작성과 증인 수를 간소화한 군인의 ‘출정유언’, 청동 저울 앞에서 상속인을 단 한 사람으로 한정하는 ‘동형(銅衡)유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유언의 조건과 형식을 정했다. 재산을 상속하는 유언을 남기는 것은 로마시민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로마법에서 유언의 효력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빚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원전 93년께 벌어진 ‘쿠리우스 송사(causa curiana)’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상속인으로 지정하고, 그 아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죽으면 쿠리우스에게 재산을 넘긴다’는 유언을 작성한 사람이 막상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면서 일이 꼬였다. 유언의 자구에 충실해야 한다는 ‘문언(文言)주의’와 유언자의 의사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사(意思)주의’가 팽팽하게 맞섰다.

재산 상속이 걸린 일인 만큼 유언이 인정받는 조건은 까다롭다. 로마법의 깐깐한 유언 작성 및 집행 규정은 독일 민법과 일본 민법을 거쳐 한국 민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행 민법은 자필증서와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등 다섯 가지로 유언 방식을 제한한다. 가장 일반적인 자필증서는 유언의 내용과 작성 날짜, 주소, 성명, 재산 목록을 모두 유언자가 직접 손으로 써야만 효력이 인정된다. 위·변조를 막는다는 취지로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제 대법원이 산소호흡기를 낀 채 병상에서 특정 가족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한 내용의 구수증서를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유언자가 “예금채권과 전세보증금 등 전 재산을 (이부형제인) A에게 넘긴다”며 계좌번호를 구두로 남긴 유언과 이를 촬영한 장면이 유효하다고 받아들였다. 녹화 날짜가 특정되지 않고 증인의 확인·낭독 절차에 논쟁이 있었지만, 형식 조건을 따지기보다 망자의 ‘진의’를 중시했다.

2000년 전 로마 백인재판소처럼 이번 대법원판결은 유언자의 희미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전격적인 결정이 ‘유언의 효력’을 가늠하는 새 판단 기준이 될지 주목된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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