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은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가장 암울한 해였다. 외환위기로 대량 해고와 기업 부도가 일상이 됐고, 온 나라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모두가 좌절과 우울의 시간을 버티고 있던 그때, 말없이 국민을 위로한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해 국립발레단은 장벽이 높던 발레 동작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이 있는 발레’를 선보였고, 사람들은 국립극장으로 모여들었다. 해설이 있는 발레로 대중과 거리를 좁힌 발레단은 ‘찾아가는 국립발레단’을 통해 시골 곳곳, 군부대, 백화점을 찾아가 몸짓으로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이 두 프로그램은 한국 발레 대중화에 큰 획을 그은 간판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해설이 있는 발레는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레 공연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찾아가는 국립발레단은 2008년부터 국립발레단에서 여전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
‘누구나 보는 발레의 시대’를 연 사람은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66)이다. 1996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최연소 국립발레단장에 취임해 5년간 발레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힘썼고, 2008년부터 6년간 재선임돼 이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전설적 인물. 1993년까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다가 예술 경영자로도 최고의 성적표를 거머쥔 그는 “언제나 발레가 나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또 하나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오는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발레드림’의 예술감독을 맡으면서다. 어린이, 10대 무용수,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등 다양한 연령대의 무용수들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에 낙방한 11세 학생도 발레드림 공연에 나와요. 1등만 무대에 오르는 게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어요. 한국 발레계에서 무대는 정기공연 아니면 콩쿠르잖아요. 선택받은 소수만 춤춘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어른들은 발레 감상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길 바라고요.”
국립발레단장, 광주시립발레단장 등 최고의 자리에서 경영자로 일한 그는 이제 스스로를 “완전한 프리랜서 연출가”라고 했다. 보다 자유로운 시선으로 무대와 안무를 구상하니 이보다 더 재미있는 때가 또 없다고. 그래서 지금도 춤출 공간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무대를 만든다.
최 전 단장이 평생에 걸쳐 발레라는 예술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음악과 춤이 주는 자유로움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 태생의 재일 한국인 2세인 그는 “유년 시절엔 주변에 집집마다 ‘개인 스튜디오’ 같은 게 있었다”고 회상했다.
“누군가의 거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작은 발레 발표회를 열고, 어찌 보면 살롱 문화의 일종이었어요. 일상에서 예술을 접하다 보니 발레라는 걸 선택받은 소수만 즐긴다는 인식이 없었어요. 그런 즐거움을 한국에서도 느끼게 하고 싶다, 그 소망 하나로 지금까지 달렸네요.”
발레드림은 오랜 시간 쌓아온 꿈의 결실인 셈이다. 전민철, 김기민 등 스타 무용수가 엄청난 팬덤을 갖고 있지만 재능이 있어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무용수가 많고, 이들을 부지런히 발굴해 무대에 세우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 믿는다. “재능 있는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찾기까지 너무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세계 유수 발레단에 한국인 무용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위상은 높아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들 해외로만 눈을 돌리고 콩쿠르나 입시 경쟁을 하니까요.”
이번 무대에는 특별 게스트도 함께한다. 안무가 유회웅, 발레 의상 디자이너 정한아 등이 최 전 단장이 대화를 나눈다.
“발레 용어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발레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드리려고요. 백스테이지가 진짜 공연장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이번 공연을 마무리하면 그는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과 올해 ‘대한민국 발레축제’ 특별 공연(5월 28일)을 준비한다. 무용수로서 활약한 시기가 비슷했고, 동시대 양대 발레단을 이끌었던 리더라는 점에서 둘은 닮은 점이 많은 동료다. 김주원 대한민국 발레축제 예술감독의 제안으로 이뤄진 이번 공연의 이름은 ‘커넥션’.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연 이들이 손수 키워온 양대 발레단의 무용수(김리회, 이재우, 강미선, 이동탁)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공연이 될 예정이다. 최태지에게 발레 무용수란 무엇일까. “음악 속에 푹 빠져 다른 세상 속에서 저절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아닐까요.”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