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3000탈삼진 고지에 단 한 개만 남겨둔 상황. 투구 수는 이미 한계치에 이르렀다. 다저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팬들 사이에선 대기록이 오늘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에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날 경기 자신의 100번째 공으로 통산 3000번째 삼진을 잡아냈다. 대기록이 수립되는 순간 팬들은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쏟아냈다. 에이스는 환하게 웃으며 김혜성, 오타니 쇼헤이 등 동료들과 포옹을 나눈 뒤 모자를 벗어 팬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커쇼의 가족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새 역사를 쓴 주인공은 ‘영원한 푸른 피의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3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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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다저스의 ‘살아있는 전설’ 클레이튼 커쇼가 개인 통산 3000탈삼진 대기록을 수립한 뒤 환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AP PHOTO |
커쇼는 3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홈 경기에 선발 등판해 6이닝 동안 9피안타(1피홈런) 1볼넷 3탈삼진 4실점을 기록했다.
비록 승리투수가 되진 못했지만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날 경기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커쇼의 역사적인 대기록에 집중됐다.
2008년 데뷔한 이래 18시즌째 빅리그에서 활약 중인 커쇼는 이 경기 전까지 탈삼진 2997개를 기록 중이었다. 이날 탈삼진 3개를 추가하면서 3000탈삼진 고지를 정복했다.
MLB 역사상 3000탈삼진을 달성한 선수는 커쇼가 20번째다. 전설적인 ‘강속구 투수’ 놀란 라이언이 5714탈삼진으로 이 부문 1위, ‘괴물 왼손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랜디 존슨이 4875개로 그 뒤를 따랐다. 현역투수로는 저스틴 벌랜더(3471개·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맥스 슈어저(3419개·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이어 세 번째다.
특히 커쇼의 3000탈삼진이 더 대단한 이유가 있다. 바로 한 팀에서 기록을 달성했다는 점이다. 2008년부터 줄곧 다저스 유니폼만 입었던 커쇼는 월터 존슨(워싱턴 세네터스)과 밥 깁슨(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이어 한 팀에서 3000탈삼진을 기록한 세 번째 투수가 됐다.
대기록을 완성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기대했던 삼진이 초반에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1회초 1점을 내준 데 이어 3회초 투런홈런을 맞았다. 조기 강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커쇼는 노련했다. 피홈런 허용 후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3회초 미겔 바르가스를 낙차 큰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은 데 이어 5회초 2사 1루 상황에서 레난 소사도 커브로 돌려세웠다.
6회초에도 마운드에 오른 커쇼는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비니 카프라를 상대로 역사적인 3000번째 삼진을 잡아냈다. 1볼 2스트라이크에서 4구째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에 절묘하게 걸쳤다.
스포츠 통계회사인 ‘엘리아스 스포츠뷰로’에 따르면 커쇼는 2787⅔이닝 만에 3000탈삼진을 잡아냈다. 이는 역대 네 번째로 빠른 기록이다. 커쇼보다 적은 이닝으로 3000탈삼진을 잡은 선수는 존슨(2470⅔이닝), 슈어저(2516이닝), 페드로 마르티네스(2647⅔이닝)뿐이다.
커쇼의 대기록은 더 일찍 이뤄질 수 있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커쇼는 매 시즌 평균 218탈삼진을 잡았다. 하지만 최근 매 시즌 부상에 시달리면서 페이스가 뚝 떨어졌다.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지난 시즌에도 무릎과 발가락 수술로 30이닝을 던져 탈삼진 24개를 잡은 것이 전부였다. 현지에선 대기록을 앞두고 은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긴 부상의 터널을 뚫고 돌아온 커쇼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성기 시절의 빠른 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활처럼 휘어 들어오는 커브, 슬라이더는 여전히 위력적이다.
올 시즌 9경기에 선발로 나와 4승 무패 평군자책점 3.43을 기록한 커쇼는 44⅔이닝 동안 32탈삼진을 추가하면서 3000탈삼진의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커쇼가 역사를 쓴 날, 다저스 동료들은 짜릿한 끝내기 승리를 선물했다. 화이트삭스에 줄곧 끌려가던 다저스는 2-4로 뒤진 9회말 3점을 뽑아 5-4 역전승을 일궈냈다. 4-4 동점인 2사 1, 2루 상황에서 프레디 프리먼이 끝내기 안타를 때려 2루주자 오타니를 홈에 불러들였다. 9번타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한 김혜성도 3타수 1안타 1볼넷으로 두 차례 출루하면서 승리에 힘을 보탰다.
커쇼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정말 특별한 밤이었다. (기록을 세우기까지) 참 오래 기다렸다”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고,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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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다저스 클레이튼 커쇼의 역투 장면. 사진=AP PHO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