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생인 내 아버지는 평생 벌을 치셨다. 늘 꽃이 피는 땅 위에 계셨다. 음력 설이 지나면 매화꽃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고, 아카시아가 북상하면 철원까지 벌통을 옮겼다. 꽃을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 이사하며 말벌을 하루에 수백 마리씩 잡았고, 벌통 옆 천막에서 계절을 보냈다. 꽃의 계절 5월이 오면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후와 환경에 생계를 맡겨야 하는 양봉업자의 삶은 매 순간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겐 흔들리지 않는 경영 철학이 있었다. ‘벌은 속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원칙이었다. 꿀을 뜨는 계절에 설탕을 먹이지 말아야 진짜 꿀이 나온다는 것. 꽃이 핀 만큼, 벌이 날갯짓을 한 만큼만 꿀이 찬다. 그 원칙대로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벌통을 늘리고 꿀을 모았다. 요행 없이 땀 흘린 만큼만 보답받는 양봉의 세계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몸소 보여준 산 교육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5남매의 학비를 마련했다.
양봉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꿀이 차오르기를 오랜 시간 인내하고 벌이 혹한을 견디는 과정은 자산이 스스로 불어나길 기다리는 투자자의 모습과 닮았다. 아버지는 꽃을 따라 전국을 누비다가 입동 무렵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손은 거칠었고 얼굴은 검게 탔지만, 아버지는 불평하지 않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견디며 말보다 몸을 내놓는 방식으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위대한 투자자였다. 당장 확실한 수익률이 보이지 않는 양봉에 평생을 던졌다. 사실 아버지는 투자 수익률 같은 말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에 시간을 쓰고, 어디에 돈을 써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큰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972년 늦가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정착한 것도 자식만큼은 걸어서 학교에 보내겠다는 소망, 부모의 무학(無學)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의지였다.
아버지는 일곱 식구가 방 한 칸을 쓰던 시절에도 지하실 창고를 고쳐 딸들의 공부방을 마련하고 나무 평상을 짜주셨다. 보일러가 고장 나면 돈을 아낀다며 직접 고쳐 쓴 탓에 방바닥은 계속 높아졌다. 옥탑방을 올리고 하숙을 쳐서 얻은 수입을 오롯이 교육이라는 ‘가장 확실한 미래 가치’에 재투자했다. 그에겐 새 옷 한 벌보다 딸의 참고서 한 권이 먼저였고, 편한 삶보다 자식이 공부할 시간이 우선이었다. 회수 기간은 길었지만, 그 투자는 한 세대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아버지의 성실함은 진한 꿀처럼 불순물이 없었다. 그 투자는 시간이 흘러 복리로 불어났고, 지하실에서 공부하던 넷째 딸을 변호사로 키워냈다.
지난주 들려온 아버지의 암 전이 소식에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나는 올해도 아버지의 꿀단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버지가 평생 모은 것은 단순한 꿀이 아니라, 어떤 시련 속에서도 우리 가족이 평생 꺼내 쓸 수 있는 용기다. 성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복리로 돌아오기 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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