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대변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韓美日외교장관회의 공동성명 포함된
北비핵화에 “실현불가능한 망상” 일축
핵보유 인정 북미대화 재개 전제조건화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이 담긴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발신하고 있다. 자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대화 테이블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내년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노벨 평화상급’ 외교적 업적을 내려는 트럼프 대통령과 한·미·일 외교당국이 북한 비핵화 이슈를 두고 어정쩡하게 엇박자를 내는 가운데, 평양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외치는 형세다. “트럼프, 당신은 어떤 생각이냐?”라고.
9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관영매체에 낸 담화에서 “미일한의 시대착오적인 《비핵화》집념은 우리 국가의 지위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외교장관회의를 계기로 벨기에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회의 공동성명에 포함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촉구를 비난한 것이다.
김 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는 실현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며 선을 그었다. 나아가 “끼리끼리 모여앉을 때마다 아무리 애써 궁리하고 부르짖어봤자 그 누구의 《비핵화》를 실현시킬 비책이 떠오르던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그 누구의 《위협》을 떠들어대며 시대착오적인 《비핵화》에 계속 집념한다면 최강의 자위적핵력량구축을 지향하는 우리의 전진도상에 무제한의 당위성과 명분만을 깔아주게 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한·미·일 외교장관회의 공동성명 가운데 비핵화 관련 내용만 콕 찍어 민감하게 반응한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에 대해 “그만큼 ‘비핵화’ 부분이 북한에 현재 가장 민감하고 적극 대응이 필요한 ‘의제’라는 것을 의미”라고 해석했다.
홍 연구위원은 북한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조선중앙통신사 논평→외무성 대변인 담화→김여정 부부장 담화까지 대응 수위를 높여온 점에 주목했다.
또 김 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북한 비핵화 원칙 포기’와 ‘핵보유국 인정’을 북미대화 재개 조건으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위협감소와 핵군비통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위험한 말과 행동이 우려 키워
이러한 북한의 계단식 비핵화 거부 메시지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여러 차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언급한 것과 맞물리며 우려를 자아낸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1월 22일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했을 당시에는 이를 트럼프 특유의 화법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고 북미대화 재개 희망을 밝히는 과정에서 잠재적 대화상대인 김 위원장의 체면을 세워주는 정도은 언급일 수 있다는 게 전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이 여러 차례 계속되자 한·일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그가 실제로 북한의 핵보유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전략 핵탄두 등 북한의 대미 위협 요소만 덜어내는 식의 나쁜 거래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를 잡아가는 셈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핵심 동맹국과 서방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일으킨 동시에,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편들고 우크라이나의 팔목을 비틀고 있는 현실과도 겹친다.
목표를 위해 나쁜 수단을 쓰는 것을 개의치 않는 그의 장사꾼 기질이 북한을 인도나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같은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으로 만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경제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관세전쟁에 대한 내부의 반대를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때로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로 받아치고 있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北, 관세전쟁·우크라戰 상황 살피며 핵강화?
이러한 가운데, 북한은 당분간 미국발 관세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주시하며 미국을 향한 핵보유국 인정투쟁과 핵역량 강화에 주력할 전망이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현재로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집중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미국이 중동문제와 우크라이나 전쟁, 관세전쟁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기 버거운 형국이라고 봤다.
임 교수는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 시도를 우려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북한이 일단 핵무력 증강에 속도를 낼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