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고 싶어"…K직장인 심리적 피난처 떠오른 '화캉스'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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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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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화장실에서 코 골면서 잔 적 있어요." (중소기업 직장인 김 모씨)

"출근하자마자 화캉스 다녀온다는 말, 우리 회사에선 흔해요." (금융권 직장인 강 모씨)

"업무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가기도 해요" (대기업 직장인 류 모씨)

회사 책상도, 휴게실도 아닌 화장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직장인들이 늘면서 최근 한국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화캉스(화장실+바캉스)'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미국에서도 Z세대를 중심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욕실 캠핑(bathroom camping)' 영상이 확산하며 '화장실은 피로 사회의 피난처'라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혼자 있고 싶어"…대기업도 중소기업 직원에 새로운 안식처로

대전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0)는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머리가 아파서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식혔다"며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화장실에 들어가 휴대전화기로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가끔은 너무 피곤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잠을 취했다 있다"며 "당시 코를 골 정도로 꽤 깊은 숙면을 취했다 있다"고 털어놨다.

방송국 프로듀서 김모 씨(29)는 "방송 편집으로 밤을 새우고 피곤할 때 화장실에서 잠든 적이 있다"며 "지금은 개인 편집실이 생겨 화장실에 쉬러 덜 가긴 하지만, 회의할 땐 여전히 주기적으로 화장실로 간다"고 했다.

이어 "한때 회사 남자 직원들 사이에 코인 열풍이 불었을 때 남자 화장실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다들 유튜브도 보고, 카톡하고, 주식·코인도 확인하며 쉬었다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류 모씨(29)는 "우리 회사에도 출근 시간대뿐 아니라 업무 중간에 화장실에서 휴식을 즐기는 직원들이 꽤 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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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온라인커뮤니티에는 "출근하자마자 화캉스 다녀왔다", "스트레스받아 화장실에서 마음 안정 찾았다", "참았다가 회사에서 화캉스하며 해결한다"는 등의 게시물이 심심찮게 보인다.

이에 대해 "아침부터 화캉스는 너무한 거 아니냐", "양심이 없는 거냐, 회사에 놀러 왔냐", "내 후배였으면 진짜 화났을 듯"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서울 소재 한 금융권에서 일하는 직장인 강모 씨(30)는 "우리 회사엔 화캉스를 즐기는 사람이 정말 많다. 특히 오전 출근 직후와 퇴근 직전엔 화장실 줄이 너무 길다. 그래서 화장실이 급하면 아예 다른 층으로 간다"며 "몇몇 칸은 회전이 빠른데, 어떤 칸은 진짜 사람이 안 나와서 불편할 정도"라고 토로했다.

◇미국 누리꾼 사이에서도 '욕실 캠핑' 열풍

출처=틱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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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흐름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욕실 캠핑'이라는 이름으로 Z세대 사이에 유사한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집이나 학교, 직장의 화장실에 들어가 조명을 켜고, 간식이나 노트북을 챙겨 영화나 영상을 보거나 멍하니 쉬는 모습의 영상들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건식 화장실이 일반적인 미국의 주거 환경 특성상 욕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워 자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한 틱톡커는 "욕실 캠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이제 10세부터 18세가 샤워를 2시간씩 하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고, 해당 영상은 조회수 972만회를 기록했다.

또 다른 이용자는 "화장실 캠핑은 내가 한 투자 중 상위 5위 안에 든다"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을 땐 무조건 화장실로 간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화장실은 단순한 위생 공간이 아니라 '치유와 안정의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 이용자는 "부모님이 싸우고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늘 화장실로 도망쳤다. 내 방에는 잠금장치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몇 시간씩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가 있다. 사실 좀 슬픈 일"이라고 회상했다.

다른 이용자들도 "화장실 캠핑이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집에서 가장 안전한 방이 욕실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다", "화장실은 아무도 나를 괴롭힐 수 없는 공간이다. 샤워 전후로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게시물을 올렸고 이는 미국 누리꾼들의 큰 공감을 얻었다.

◇전문가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한 공간 찾은 것"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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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화장실 캠핑'이나 '화캉스' 같은 현상은 현대인들이 직장, 학교, 가정 등에서의 스트레스와 감정 피로가 누적된 상황에서, 개인 공간을 갖기 어려운 청년층이 유일하게 허용되는 '프라이버시 존'으로 화장실을 선택하게 됐다고 해석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쓰레기 집처럼 집안이 엉망인 경우에도 화장실만은 유독 깨끗한 사례가 많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화장실을 마음이 안정되는 공간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라며 "화장실은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곳이며, 의외로 아늑하고 안전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고 배설이라는 본능적 행위와 연결된 장소이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예전에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화장실이 더 깨끗하고 에어컨이나 난방 등 환경도 쾌적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화캉스'가 늘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특히 경쟁과 피로가 만연한 사회에서 젊은 직장인들은 회사 안에서도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인간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이며, 이는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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