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처제와 선을 넘었습니다”…성폭행 일삼았던 국부가 있다? [히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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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흑인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전제(前提)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될 때거나 침대 위에서 쾌락을 맛볼 때거나. “모든 인간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평등합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해내던 백인 사내의 집에서 수백명의 흑인 노예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나이 많은 흑인부터, 아주 어린 흑인까지. 그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단지 그의 재산이었을 뿐이니까. 흑인 노예들끼리 눈이 맞아 아이를 가졌을 때 그는 누구보다 기꺼워했는데, 그 자식이 다시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축을 흘레붙이는 축산업자의 표정으로 그는 흑인 노예들의 잠자리를 부추겼다. 밖에서는 흑인을 위한 자유의 투사, 안에서는 흑인 가축으로 부리는 농장주. 미국 건국의 아버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이야기였다.

제퍼슨은 흑인의 단물을 알차게 빨았다. 경제적으로도, 성적으로도 그랬다. 흑인 여성 노예 샐리 헤밍스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여, 여섯 명의 사생아를 봤다. 헤밍스는 제퍼슨의 사별한 아내의 이복동생(다른 말로 처제)이었다. 헤밍스의 엄마는 농장주의 성 노예였고, 헤밍스 그 자신도 형부 제퍼슨의 성노예에 가까웠다. 저주의 악순환. 제퍼슨의 노예제를 향한 이율배반은 경제사에 얼룩을 남겼다.

“과거는 묻지마세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과거는 묻지마세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흑인 노예를 부린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은 흑인 노예의 피와 땀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대농장의 농장주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먹는 고기와 우유, 입는 비단옷, 거주하는 웅장한 저택이 노예들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노예 없이는 제퍼슨의 윤택한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인은 와인과 캐비어를 즐기면서, 퍽퍽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민중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는 위선자의 역사는 유구한데, 제퍼슨은 그 단적인 예였다. 제퍼슨은 사람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계몽주의자였다. 인디언도, 흑인 노예도, 양질의 교육과 문명 교화로 당당한 자유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힘줘 말했을 때, 그의 노예들은 채찍을 맞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제퍼슨 저택. [사진출처=Martin Falbisoner]

버지니아의 제퍼슨 저택. [사진출처=Martin Falbisoner]

제퍼슨의 문장으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가슴이 뛰었다. 제퍼슨은 미국 3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아내 마사가 죽자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 재산 목록 중의 하나가 아내의 이복 여동생 샐리 헤밍스였다. 마사의 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건드려 태어난 딸. 핏줄에 흑인 노예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노예가 된다는 게 당대의 법이었으므로, 샐리 헤밍스는 노예로 살아야 했다. 피부색이 조금 덜 검었어도, 노예는 노예일 뿐이었다.

해밍스는 그의 재산이었으므로, 제퍼슨은 그녀의 육체를 탐했다. 제퍼슨은 40대였고, 헤밍스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다. 주인의 요구를 10대의 노예는 거절할 수 없었다. 헤밍스는 그렇게 여섯 아이를 낳았다. 여섯 모두 노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퍼슨의 계몽주의는 언제나 제집의 노예들을 비추지 않았다. 다른 대감 댁 흑인 노예들이 “제퍼슨이야말로 우리 흑인을 위한 정치인”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울 때, 제퍼슨의 노예들은 속이 메슥거렸다.

“형부...언니가 없다고 이러시면 안 돼요...” 샐리 헤밍스.

“형부...언니가 없다고 이러시면 안 돼요...” 샐리 헤밍스.

미국, 프랑스로부터 땅을 사다

1803년 기회가 크게 열렸다. 프랑스가 지배하던 미국 중부의 너른 땅 루이지애나가 매물로 나와서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전쟁만으로 벅차서, 신대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퍼슨은 1500만 달러면 미국의 영토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에 벅찼다.

거대한 영토의 힘으로 미국을 다시 한번 자유의 나라로 세우고자 했다. 자영농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굳건히 세울 수 있다는 청사진이 마음에 그려졌다. 해방된 노예들도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더 많은 자영농이 미국의 자유 시민으로 설수록, 제퍼슨의 위상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었다.

“프랑스기 내리고, 성조기 올려.” 1803년 미국으로 이양되는 루이지애나.

“프랑스기 내리고, 성조기 올려.” 1803년 미국으로 이양되는 루이지애나.

꿈은 무지갯빛이었으나, 현실은 점점 흑빛으로 어두워졌다. 루이지애나 땅을 찾은 건 자영농이 아니라 노예 농장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유 흑인들이 짚신을 신고 루이지애나로 자유를 찾아 떠날 때, 백인 농장주들은 마차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 땅을 점거했다.

루이지애나는 하얗게 물들었다. 백인과 그들의 목화밭이 뒤덮어서였다. 조면기가 개발되면서 19세기 초 목화 산업이 융성했다. 루이지애나 남부는 덥고 습해서 목화가 생육하기 좋았다. 많은 농장주가 루이지애나로 몰려들었고, 그보다 더 많은 노예들이 루이지애나로 끌려들었다. 하얀 목화밭에 검은 노예들이 붙들렸다. 농장주가 휘두른 채찍에 흑인의 피가 하얀 목화를 물들였다. 해방된 흑인들이 루이지애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건 자유의 땅이 아니라, 또 다른 노예 지옥의 땅이었다.

하얀 목화밭. [사진출처=Bubba73]

하얀 목화밭. [사진출처=Bubba73]

‘말로는’ 인본주의자

1808년, 제퍼슨은 자신이 인본주의자임을 세상이 알기를 원해서, 국제 노예무역을 불법화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아메리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남부 노예 농장주들은 코웃음을 쳤다. 미국의 다른 주에서 노예를 사들이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노예 값을 많이 쳐준다는 얘기에 흥분한 인근 주의 시민들은 노예를 사들이고, 거기에 새끼를 낳게 만들어, 통으로 남부에 팔아넘겼다. 인근 버지니아에서는 노예 농장이 가장 큰 수익 사업이기도 했다.

남부로 팔아넘겨진 노예가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Sold Down the river’(누군가를 배신하다)라는 표현이 영어에 남았다. 미시시피강 지역에서 노예를 더 가혹한 남부 지역으로 팔아넘기는 행위를 가리키던 것이었다. 미국 남부는 노예 지옥이 되고 있었다.

“노예, 사고팔지 마세요. 저는 빼고요.” 48세 당시 토머스 제퍼슨.

“노예, 사고팔지 마세요. 저는 빼고요.” 48세 당시 토머스 제퍼슨.

목화의 순백함은 고귀하고 순결한만큼이나, 많은 지력과 인력을 요구했다. 목화밭은 몇 년 지나지 못해 옥토의 양분을 모두 갉아먹었다. 목화밭에서 일해야 하는 노예들은 수시로 죽어 나갔다. 땅과 노예가 죽는 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수익이 줄어드는 걸 농장주들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새로운 땅, 새로운 수익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신생 독립국 멕시코의 영토 ‘테하스’였다. 오늘날 텍사스라고 불리는 땅이었다.

“제퍼슨이란 남자가 우리 흑인을 위한다는데...” 아고스티노 브루니아스가 그린 ‘자유로운 유색 여성들’. 1764년 작품.

“제퍼슨이란 남자가 우리 흑인을 위한다는데...” 아고스티노 브루니아스가 그린 ‘자유로운 유색 여성들’. 1764년 작품.

미국-멕시코 전쟁의 발발

1821년, 멕시코는 가까스로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홀로서기는 힘든 것이었으나, 그만큼 창대한 것이어서, 그들은 노예제가 없는 깨끗한 나라를 원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가톨릭의 나라. 멕시코의 출범이었다.

멕시코의 땅은 광활한 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새 나라의 지도자들은 멕시코 시민들에게 테하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채근했지만, 아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곳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노예제 없는 멕시코여, 영원하라”. 멕시코 독립을 기념하는 그림.

“노예제 없는 멕시코여, 영원하라”. 멕시코 독립을 기념하는 그림.

제 나라의 국민이 말을 듣지 않자 멕시코는 묘안을 냈다. 미국과 맞댄 국경을 열어버린 것이었다. 미국의 이민자들을 멕시코의 새로운 시민으로 만들어, 허허벌판을 의젓한 도시로 키워내겠다는 전략이었다. 멕시코의 테하스로 미국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멕시코의 위정자들은 세 가지를 몰랐다. 미국 이민자들은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도였고, 노예제를 성경만큼이나 찬양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멕시코의 법과 규칙에는 나초 만큼도 관심 없었다는 사실을. 백인 이민자들의 뒤에는 수천 명 흑인 노예들이 짐짝처럼 끌려왔다. 멕시코는 노예제가 불법이었으므로, 그 나라 관리들은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백인 이민자들은 “계약직 노동자”라고 둘러댔다.

테하스는 그렇게 목화와 노예로 가득해졌다. 가톨릭교도인 자유 시민이 세운 멕시코의 테하스는 개신교 미국인 농장주들의 땅이었다.

“어이,어이, 여기 텍사스는 멕시코도, 미국도 아닌 우리 코만치족의 땅이라고.” 1835년 조지 캐틀린이 그린 그림.

“어이,어이, 여기 텍사스는 멕시코도, 미국도 아닌 우리 코만치족의 땅이라고.” 1835년 조지 캐틀린이 그린 그림.

텍사스 결국 미국의 땅으로...

테하스가 스페인식 발음 대신, 영어식 ‘텍사스’로 더 불리게 됐을 때, 멕시코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무법천지가 돼 가는 테하스 땅을 다시 정화해야 할 시간이었다. 정화 작업의 첫 스텝은 무엇보다 오물이 들어오는 걸 방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정부는 국경 문부터 닫았다. 테하스 주민들에게 노예를 풀어줄 것을 재차 주문했다.

“타코벨은 폐업 시키고, 맥도날드를 짓자고.” 미국 장군 스콧의 멕시코 입성. 아돌프 장 바티스트 바요의 작품.

“타코벨은 폐업 시키고, 맥도날드를 짓자고.” 미국 장군 스콧의 멕시코 입성. 아돌프 장 바티스트 바요의 작품.

미국 이민자들에게 노예제란 신의 율법이어서, 이를 건드리는 자는 나라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1836년 테하스의 미국 이민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텍사스 혁명’이었다. 미국은 “우리 시민의 안전을 지키겠다”면서 군대를 보내 ‘혁명’(or 반란)을 도왔다. 텍사스 공화국의 건립이었다.

미국은 마치 집 나간 아이를 되찾아오기라도 한 듯이, 텍사스를 합병했다. 멕시코는 빼앗긴 물건을 찾으러 왔다가, 캘리포니아·유타·네바다·애리조나까지 빼앗겨 버렸다(미국-멕시코전쟁, 1846~1848년). 그만큼 목화밭이 멀리 퍼졌고, 흑인의 피비린내가 곳곳에 흩날렸다.

워싱턴 D.C. 제퍼슨 기념관. [사진출처=Joe Ravi]

워싱턴 D.C. 제퍼슨 기념관. [사진출처=Joe Ravi]

<네줄요약>

ㅇ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흑인 노예 해방에 일조한 정치인이었다.

ㅇ그러나 그는 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노예를 거닐었고, 흑인 혼혈인 처제를 건드리기도 했다.

ㅇ처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노예 목록에 올렸다.

ㅇ제퍼슨은 내로남불이었다.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역사(히스토리)와 경제(이코노미)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기자 구독을 눌러주세요.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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