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석벽에 ‘만절필동’ 새긴 뜻은[여행스케치]

4 days ago 4

속리산국립공원 화양구곡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1곡 경천벽.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1곡 경천벽.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6곡 능운대.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6곡 능운대.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7곡 와룡암.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7곡 와룡암.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8곡 학소대.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8곡 학소대.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너를 용서하고….’ 한로로의 ‘사랑하게 될 거야’를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다.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따라가면 어느새 10리 길. 그 여정의 아홉 군데, 굽이도는 물과 절벽과 바위들이 소요객을 맞이한다. 충북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이다. 조선 당쟁사의 거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이 노년에 몸을 부쳐 살던 화양동계곡이다. 그 풍경은 우암이 평생 얻고자 한 예(禮)를 수양하기에 더 좋은 장소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가슴 한쪽은 시리다. 우암은 은거했지만 중앙 정계에 대한 안테나는 접지 않았다. 이곳은 세력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한 조선 후기 환국(換局) 정치의 또 다른 중심이었다.

● 하늘을 떠받친 절벽, 구름이 비치는 못

화양구곡은 우암이 공자보다 숭앙한 송나라 주자가 말년에 들어가 살던 중국 푸젠(福建)성 우이(武夷)산 계곡을 노래한 ‘무이(武夷)구곡’을 본떴다. 우암은 붕당 파워게임 끝에 유배 도중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5년 뒤 우암을 따르는 서인 노론은 재기했다. 왕실을 압도하는 노론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수제자 권상하가 화양서원과 만동묘(萬東廟)를 짓고 스승을 기리며 절경 아홉 곳을 정한 것이 화양구곡이다.

속리산국립공원 화양탐방지원센터에서 조금 걸으면 1곡 경천벽(擎天壁)이 계곡 너머 나타난다. 이름대로 하늘을 떠받들 듯한 기암절벽이다. 옛 기록처럼 ‘수백 장(丈, 1장은 약 3m)’ 높이와 넓이는 아니지만 웅장하다. 1744년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관한 기록을 모은 책 ‘화양지(華陽誌)’는 ‘우뚝 선 모습이 귀신이 깎아 놓은 듯하다’고 했다(박준호, ‘2011 국립청주박물관 새 단장 기념 특별전 화양서원 만동묘 전시 도록’, 2011). 우암이 직접 쓴 ‘華陽洞門(화양동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무성한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진 않는다. 우암은 스스로 ‘화양동주(華陽洞主)’라 부를 정도로 이 계곡을 아꼈다.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2곡 운영담.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2곡 운영담.
경천벽에서 1.2km 정도 올라가면 2곡 운영담(雲影潭)이 보인다. 못은 아니지만 물결이 잔잔해 주위 경치를 잘 반영한다. 주자의 시구 ‘천광운영(天光雲影·하늘빛과 구름 그림자)’에서 따왔다. 구름이 비칠 정도로 맑다는 얘기다. 물가 큰 바위 아래쪽에 ‘雲影潭’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우암의 제자 민진원 글씨다. 화양구곡 중 5곳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3곡 읍궁암.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3곡 읍궁암.
운영담에서 좀 더 걸으면 계곡을 흐르는 화양천 남쪽 가에 3곡 읍궁암(泣弓巖)이 보인다. 삼전도 치욕을 갚으려 북벌(北伐)을 염원하던 효종과 우암은 독대할 정도로 돈독했다. 1659년 효종은 뜻을 못 이루고 승하했다. 우암은 1666년 화양구곡에 온 뒤 효종 휘일(諱日)이면 ‘희면서 둥글고 매끄러우며 면도 가지런한’ 읍궁암에서 무릎 꿇고 곡했다. 읍궁은 중국 사서 ‘사기’에 나온다. 고대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하자, 남은 신하들은 용의 수염을 붙잡고 올라탔다. 하지만 수염이 빠지면서 추락한 뒤 같이 떨어진 황제의 활(弓)을 붙잡고 울었다(泣)는 데서 비롯됐다.

읍궁암에는 네모나게 옴폭한 홈이 여럿 있다. 읍궁비(碑)를 세운 자리다. 화양천은 폭우에 자주 넘친다. 그때마다 비석이 쓸려 내려가 다시 만들곤 했다. 그렇게 찾은 비석 4기가 옛 화양서원 터에 세워져 있다.

화양구곡 만동묘. 계단이 좁고 가팔라 꼿꼿히 서서 오르기 힘들다.

화양구곡 만동묘. 계단이 좁고 가팔라 꼿꼿히 서서 오르기 힘들다.
서원 터 맞은편 언덕에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는 만동묘가 복원돼 있다. 우암은 신종이 임진왜란 때 파병해 도왔고, 의종은 나라가 망하면 임금은 죽어야 하는 도리를 지켰다며 사당을 지으라고 유언했다. 만동묘는 5∼10개 돌계단으로 이뤄진 기단 다섯 개 위에 있다. 계단은 성인 발을 온전히 딛지 못할 만큼 폭이 좁고 몹시 가팔라 꼿꼿이 서서 오르기 어렵다.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다. 지독한 모화사상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사대라기보다는 의리와 정도(正道)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박준호). ● 초탈의 경지, 태평한 천하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4곡 금사담과 암서재.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4곡 금사담과 암서재.
읍궁암을 지나 상류로 향하면 금사담(金沙潭)이다. 물결이 잔잔하고 물이 맑아 햇빛 받은 모래가 금빛을 띤다는 곳이다. 금사담 북쪽 절벽 위에 우암이 강학하던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소박한 두 칸짜리 기와집이다. 권상하가 쓴 ‘암서재중수기(重修記)’에 따르면 우암이 머물던 초당은 암서재 건너편에 있어 ‘일엽편주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렸다’.

그 오른쪽으로 30m쯤 떨어진 큰 바위에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창오산은 구름이 끊겼고, 주자가 살던 무이산은 텅 비었다는 뜻이다. 명나라 패망으로 무너져 가는 중화(中華)문화를 조선에서 지켜 내고 싶다는 우암의 의지가 엿보인다. 몹쓸 사대주의에 불과할까. ‘송시열의 중화주의는 명 왕조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예의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 가치의 존숭과 계승 의식’이라는 분석도 있다(이한우, ‘이한우의 조선당쟁사’, 21세기북스, 2025).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5곡 첨성대.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5곡 첨성대.
금사담을 뒤로 하고 걸으면 오른쪽 낙양산 중턱에 서로를 이고 진 듯 큰 바위 대여섯 개가 뭉쳐 있다. 5곡 첨성대(瞻星臺)다. 첨성대는 올라서 보는 전망도 좋지만, 그 아래 새겨진 글귀를 봐야 한다. 첨성대를 밑에서 받치는 바위는 높이 10m가량 석벽이다. 그 중간쯤 ‘萬折必東(만절필동)’이 새겨져 있다. 선조의 어필(御筆)이다. ‘강물이 무수히 굽이쳐 흘러도 결국 동쪽 바다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충절이다. 이 석벽을 왼쪽으로 돌아 내리면 ‘非禮不動(비례부동·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1674년 우암의 제자 민정중이 중국 베이징에서 구해 온 의종의 글씨다. 크게 기뻐했을 우암은 그해 예송(禮訟) 논쟁에서 패하면서 함경도로 유배를 떠난다.

첨성대에서 계곡을 건너면 6곡 능운대(凌雲臺)가 있다. ‘화양지’ 표현대로 ‘(땅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듯’ 위풍당당한 바위다. ‘능운’은 구름보다 높아 세속을 벗어난 경지라는 뜻이다. 다만 전깃줄 10여 가닥이 능운대를 꽁꽁 묶듯 가로지르고 있어 속세를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능운대에서 상류로 1km쯤 가면 7곡 와룡암(臥龍巖)이 화양천에 엎드려 있다. 길이 약 30m, 폭 7∼8m 되는데 ‘전체가 구불구불해 마치 용 같다’는 옛사람 말이 얼추 맞는다. 구불구불한 부위를 용 비늘로 보기도 한다. 앞서 6곡까지는 초탈의 경지를 바라듯 이름 지었지만, 이곳 와룡은 ‘삼국지’ 제갈량처럼 입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느껴진다.

좀 더 오르면 화양천 오른쪽 너머에 소나무 우거진 큰 절벽이 보인다. 청학(靑鶴)이 둥지를 틀었다는 8곡 학소대(鶴巢臺)다. 청학은 날개 여덟에 다리 하나, 사람 얼굴에 새 부리를 한 상상의 새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했다. 유학자라면 누구나 꿈꾼 세상일 게다.

● 바위에 새긴 글자들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9곡 파곶.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구곡의 9곡 파곶.
학소대에서 조금 더 가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9곡 파곶(巴串)이 나온다. 폭이 커진 화양천에 희고 아주 넓은 바위가 평평하게 퍼져 있다. ‘계곡물이 바위를 꿰고(串) 흐르는 모양이 큰 뱀(巴) 같아 파곶이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화양지’는 전한다. 물이 마르면 그 넓은 바위에 1000명 넘게 앉을 수 있었다는데 과장이리라. 다만 그 위에서 많이들 쉬고 먹고 놀고 한 듯하다.

구곡에는 들지 못했지만 거북이와 정말 많이 닮은 거북바위.

구곡에는 들지 못했지만 거북이와 정말 많이 닮은 거북바위.
파곶 주변 큰 바위들에는 유독 유생들 이름과 글귀가 많이 새겨져 있다. 망한 명나라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을 버젓이 새기기도 했다. 바위는 영원불멸을 상징한다. 우암도, 그를 추종하던 사림도 바위에 새긴 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터다. 그러나 그 의미가 모두 날아가 버릴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여행스케치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어제의 프로야구

    어제의 프로야구

  • 동아광장

  • K-TECH 글로벌 리더스

    K-TECH 글로벌 리더스

글·사진 괴산=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