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국민 절반 장기적 울분 상태, 가장 큰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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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독일 통일 후 구(舊)동독 주민들 중에는 화병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번영을 기대했건만 ‘2등 시민’으로 전락해 차별과 실직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이 만연했다. 당시 독일 학계에선 이 현상을 ‘외상 후 울분 장애(PTED)’라고 설명했다. 전쟁이나 재난 피해자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생기듯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취급을 거듭 당하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수시로 치밀어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큰일을 겪은 사회가 제때 상처를 수습하지 않으면 이런 집단적 울분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인은 절반 이상이 울화통을 안고 산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지난달 성인 남녀 1500명을 조사한 결과다. 54.9%가 장기적 울분 상태로 나타났다. 지난해 9월 조사 때보다 약 6%포인트 오른 수치다. 눈에 띄는 건 울분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한 응답자들의 답변이다.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85.5%), ‘정치와 정당의 부패’(85.2%)를 가장 많이 꼽았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 어수선한 대선이 국민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결과로 보인다.

▷울분에는 배신당했다는 감정이 녹아 있다. 상식과 공정에 대한 믿음이 현실에서 자꾸 부정당할 때, 신념과 현실의 괴리감이 클 때 사람들은 울분을 느낀다. “이게 나라냐”란 냉소가 그럴 때 나온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난데없는 계엄 선포는 국민들에게 ‘외상 후 울분 장애’ 수준의 충격을 준 사건이다. 적어도 국가 지도자라면 법과 상식에 따를 것이란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윤 전 대통령이 잘못을 축소하려 탄핵 법정에서 반복했던 궤변과 뻔뻔한 언행은 국민의 화를 더 돋웠다.

▷사회에 울분이 넘치면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킨다. 체제 불신과 정치 혐오가 커지기 때문이다. 울분에 찬 상태에선 합리적 대안을 찾기보단 감정적 대립으로 빠지기 쉽다. 서울대 연구팀이 2018년에 처음 ‘한국 사회 울분 조사’를 할 때만 해도 ‘정부 비리’ ‘정치 부패’는 울분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 중 5위 정도였는데 이후 해마다 순위가 올랐다. 우리 정치가 갈수록 양극화되고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는 현 상황과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울분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위험한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 일부 백인들의 울분을 자양분 삼아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우리의 이번 대선은 윤 전 대통령이 남긴 깊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계기가 돼야 하지만 한쪽은 후보 단일화, 한쪽은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에만 매몰돼 유권자들의 울분 지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울화통 터지는 정치에도 국민들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냉정한 심판을 하는 것 외엔 달리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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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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