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생애설계] 은퇴준비에는 J보다 P가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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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대 간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 중 하나가 MBTI다. 20~30대 MZ세대는 자기이해와 타인 이해의 도구로 MBTI를 적극 활용하며, 직장 내 소통은 물론 연애, 결혼, 심지어는 소비생활에서도 MBTI를 참고한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맞물려 MBTI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MBTI를 은퇴준비와 연결해 생각해 보자. 생애설계, 즉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직업·재무·건강·관계 등 인생의 다양한 영역에 대해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J형(Judging, 판단형)’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상담과 사례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변화가 빠르고 불확실성이 큰 은퇴 이후의 삶에서는 유연성과 개방성을 가진 P형(Perceiving, 인식형)의 장점이 더 빛을 발한다.

필자는 전형적인 J형이다. 가족여행을 앞두고 몇 달 전부터 숙소를 예약하고, 관광지와 맛집을 조사한다. 디지털 지도로 동선을 확인하고, 이동 시간을 엑셀로 정리해 분 단위 일정표를 만든다. 거의 완벽한 계획서가 완성된다. 그러나 실제 여행에서는 늘 변수가 생긴다. 길이 막히거나, 예약한 음식점이 문을 닫거나, 날씨가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계획대로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고 해서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일정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때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완벽한 계획은 없다는 전제 아래, 60~70% 정도만 계획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 배운 셈이다.

기업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기업들은 단기·중기·장기 사업계획과 비전, 마스터플랜을 수립한다.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전략기획 부서에 배치하고, 수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현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새로운 변수와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나리오 경영’이 도입되기도 했다. 다양한 상황을 상정해 각각의 대응 전략을 준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나리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계속 된다. 결국 기업들도 계획은 필요하지만, 계획만으로는 미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퇴직 후 삶은 일, 재무, 건강, 관계 모든 면에서 불확실하다. 수십 년 다니던 직장을 떠나는 순간, 삶은 낯선 여정이 된다. 그래서 ‘미리 은퇴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필자 역시 지난 10여 년간 생애설계 상담과 교육을 진행하며, 은퇴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경험이 쌓일수록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은퇴준비는 완벽한 계획보다, 변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순발력과 유연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실제 은퇴 이후 활기차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이들의 공통점은 계획의 완벽함이 아니라 실행 과정에서의 순발력과 개방성이었다.

한 분은 은퇴 후 해외여행만 다니겠다고 했지만,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인연이 되어 귀촌을 결심했고 지금은 4도 3촌의 생활을 하고 있다.

또 다른 분은 창업을 치밀하게 준비했으나 시장 상황이 변해 계획을 접고 자원봉사 활동부터 시작했다. 차근차근 경험을 축적해서 지금은 프린랜서 강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예상치 못한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힘, 즉 P형의 장점이 은퇴 이후 삶에서 큰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J형이 불리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J형이 가진 계획성과 체계성은 분명 강점이다. 다만, 그 강점이 지나쳐 불안과 경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 계획의 여백을 두라. 완벽한 일정표 대신 60~70%만 채우고 나머지는 유연성을 남겨두라.

- 우연을 기꺼이 수용하라. 예상치 못한 상황을 실패로 여기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라.

- 집착보다 경험을 중시하라. 계획이 흔들리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경험과 배움이 더 큰 자산임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P형은 유연성과 개방성이라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실행력이 약하고 흐름에만 맡기는 위험이 있다. 은퇴 이후에는 최소한의 계획과 실행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 큰 그림은 반드시 잡아라. 재무, 건강, 관계, 일 등 핵심 영역에서 장기 목표는 분명히 세워야 한다.

- 작은 실행 습관을 만들라. 누구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운동하기, 가계부 쓰기 등 작은 루틴은 반드시 필요하다.

- 우선순위를 정하라. 하고 싶은 일이 많을수록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J형의 체계성을 적절히 빌려오는 것이다.

은퇴 준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J형인지, P형인지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유형이든 상대 유형의 장점을 포용하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판단형(J)은 계획을 세우되, 집착하지 않고 여백을 남기고, 인식형(P)은 열린 태도를 유지하되, 최소한의 틀과 실행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은퇴준비는 J보다 P가 유리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공적인 은퇴는 J와 P를 넘어, 변화에 적응하고 기회를 만들어내는 유연한 태도에서 시작된다.

[윤형진 칼럼니스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울산동구 노동자지원센터 상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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